그저께 부터 한강이라는 작가가 쓴 '채식주의자'를 읽고 있다.
침대에 누워 아주 성의 없이 두 페이지를 읽다 잠이 들었다.
그러니 소설의 내용이며 전개가 어떻게 이어질 지는 고사하고
무얼 읽었는 지조차 전혀 기억이 없다.
그런데 어제 저녁엔 마님께서
우리집 텃밭에서 키운 야채를 한 보따리 들고
부르클린의 아파트로 오셨다.
영어로 'red leaf lettuce'와 'green leaf lettuce'라고 하는 두 색의 상추와, 깻잎,
그리고 케일을 가지고 왔는데
흔히 보던 케일과 함께 나뭇잎 배처럼 생긴 다른 종류의 케일도 있었다.
그 양이 하도 많아서 내심 놀라고 있는데
오면서 막내 처제와 지인에게 이미 한 짐을 내려 놓고 왔단다.
한 주일 만에 이리 많은 소출이 난 것은
그야말고 경이로왔다고 밖에 달리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곧 고추도 열리고,
오이와 호박도 자랄 것이라는 희망적인 예언도 하셨다.
당연히 어제 저녁 식단은 쌈밥이었다.
그것도 5겹 쌈밥.
잎이 제일 큰 빨간 상추를 밑에 깔고,
그 위에 그 보다 좀 작은 녹색 상추,
그 위에 깻잎, 그리고 나뭇잎 배처럼 생긴 케일과 그냥 케일.
쌈밥의 크기가 내 주먹만 해졌다.
그러니 아무리 밥을 조금 얹어도
그 큰 쌈이 내 입으로 들어가는 일 자체가 힘겨웠다.
오겹 쌈밥을 먹었는데도
양푼에 담긴 쌈은 양은 반도 준 것 같지 않았다.
이런 추세로 간다면
아무리 부지런히 이웃들과 나무어 먹는다고 해도
우리 텃밭에서 나는 야채를
올 여름 끄트머리까지 식탁에서
매 끼니마다 마주쳐야 하니
나는 본의 아니게 채식주의자(Vegetarian)가 되어야만 할 것 같다.
언제고 기회가 되어
내 순수한 피를 헌혈할 기회가 있다면
주사기 바늘에서 온통 초록 색의 피가 나오는 건 아닌 지 모르겠다.
얼마 후면 아내는
케일을 갈아 주스로 만들어
세탁소로 가지고 올 것이다.
나는 그 케일 주스를 마실 것이고
내 핏줄 속으로 녹색의 피가 순환을 할 것이다.
채식주의자가 된 나는 이 여름을
야채처럼, 나뭇잎처럼
푸르름으로 살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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