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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들 이야기

그대의 찬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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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찬손
여보!, 사랑하는 나의 신부, 나의 누이, 나의 어머니여.
얼마전 오페라 ‘라 보엠’ 중에 나오는 ‘그대의 찬 손’이라는 아리아를 들으며 당신을, 그리고 당신의 손을 생각했습니다.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당신의 손을 감싸 내 코트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신혼의 겨울이 생각나요.

내 주머니 안에 있는 당신의 작고 앙증맞은 손을 녹여주며

눈길을 밟고 다녀오던 매일 아침미사, 그 겨울, 그 사랑을 생각하니 마치 벽난로에 불을 지핀듯이 가슴이 따뜻해오네요.
그런데 그때는 당신의 손이 그렇게 차가운 줄 몰랐어요.

아니, 당신 손을 잡고 있다는 행복감 때문에 내 손의 감각이 그리 무디었는지도 모르죠.

그런 행복도 잠깐, 그 겨울과 작별하며 당신도 미국으로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또 하나의 겨울은 왜 그리도 춥던지요.

내 코트 주머니는 너무나 헐렁하게 느껴졌고 휑하니 찬 바람만 출렁이는 것 같았어요.

당신과 헤어진 지 일 년 후 나도 당신과 함께 미국 뉴욕땅에서 새롭고 낯선 삶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도착한 다음날부터 시작된 이민의 삶의 무게는 왜 그리도 버겁던지요.

우리의 꿈과 사랑을 서로 꺼내서 나누며 이야기할 여유도 없이

시간은 택시의 미터기처럼 털커덕 털커덕 그렇게 쉽게, 그리고 무심하게 지나갔습니다.
어느새 우리 사이엔 아이들이 다섯이나 생겼고,

나는 가장으로서의 의무때문에,

그리고 당신은 아내나 연인으로서가 아니라 엄마로서의 역할을 하느라 더더욱 정신없이 살았지요.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는 아마도 아무 의식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생각할 능력과 여유가 있다면 그렇게 고단하고 힘든 일을 계속할 수 없을 거예요.

우리의 삶도 아마 그랬겠지요.

삶의 여유가 있었더라면, 그래서 생각할 시간이 주어졌더라면 벌써 미국생활을 접어버렸을지도 모르지요.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고 숨 돌릴 여유가 되어서야

비로소 당신을 바라볼 수가 있었습니다.

당신의 눈 가엔 세월의 나이테가 비치더군요.

아!, 그리고 당신의 손------ 엣날 생각으로 잡아본 당신의 손때문에 깜짝 놀랐지요.

마치 낯선 사람의 손 같았으니까요.

당신의 손은 내 손 안에 들어오기엔 너무나 투박하고 커져 있었습니다.

당신 말로는 아이 다섯을 낳느라 뼈가 온통 늘어나서 그렇게 되었다고 했지요.
차고 매력이 없어진 당신의 손을 다시 쥐고 싶다는 생각이 없어졌습니다.

그래도 가끔은 당신의 손을 잡아볼라치면 슬그머니 손을 빼는 당신을 바라보며,

세월이 가면서 우리의 사랑도 빛바랜 사진처럼

그렇게 퇴색되어가는 것 같아 가슴이 아릿아릿해졌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그대의 찬 손’을 들으며 생각했지요.

사랑은 사랑을 넘어설 때에만 진정한 사랑이라는 걸 말이죠.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내가 당신의 손을 잡으려 할 때 당신이 슬그머니 손을 뺀 것은 나를 거절하려는 것이 아니었음을 말입니다.

오히려 당신은 차고 투박해진 손 때문에 미안해 했던 거죠.


여보, 미안하고 부끄러운 건 당신의 손이 아니라 당신의 손보다도 더 차고 투박한 나의 마음입니다.
이제사 알 것 같아요.

진정한 사랑이란 작고 따스한 손 뿐만 아니라

오히려 차고 투박한 손까지도 감싸주고 녹여주며, 입까지도 맞추어야 함을 말입니다.
지천명의 나이가 된 지금에서야 사랑은 사랑의 껍질을 깨어야 비로소 진정란 사랑이며,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하늘의 명임을 깨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