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같이 있을 땐 몰랐는데
혼자 있다 보니 슬슬 넋두리할 거리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아내는 처제와 둘이서 아리조나로 친정 부모님을 뵈러 갔다.
일주일 동안의 한시적 단기 홀아비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환갑에 가까이 이른 나이가 되고 보니
다른 건 다 그럭저러 견딜만 한데
홀아비 생활의 가장 큰 불편함은 아무래도 끼니를 때우는 일이다.
먹는 걸 좋아하는 내 삶의 질이 형편 없이 떨어지는 것도 홀아비 생활을 할 때다.
에전엔 아내가 손수 반찬 몇 가지 정도는 준비해 놓고 가더니
이 번엔 만드는 수고로움은 생략하고
몇 가지 밑반찬을 사다가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난 장에서 파는 밑반찬을 먹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걸 아내도 잘 아는 사실이다.
사다 먹는 밑반찬은 정말 성의 없음이 부조처럼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굳이 밑반찬을 사온 아내의 의중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나이가 드니 이런 저런 일이 힘에 부쳐서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비상사태(?)에 대비해
나를 강하게 단련시키려는 의도가 있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이번에도 그 밑반찬들은 고스란히 냉장고 안에서
소박을 맞은 상태로 밤낮을 지새고 있다.
국과 찌개의 중간 쯤 되는 걸 끓여 놓고 갔는데
다음날 먹어보니 약간 새콤했다.
아마도 신 김치 국물을 넣어서 그러려니 하고 그냥 먹었다.
나중에 곰곰 생각해보니 그 새콤함은
더운 날씨 때문에 맛이 살짝 가서 그런 것이었다.
그래도 난 맛이 가긴 했어도 장에서 사 온 밑반찬보다는
아내가 손수 한 콩나물과 두부가 들어간 맛 간 찌개를 훨씬 더 좋아한다.
지난 한 주일을 지옥에서 살았다.
일거리가 밀물처럼 밀려 드는데 일하는 사람이 충분하지 않아서 그랬다.
아침은 거르고 점심은 서서 대충 때웠다.
일주일을 그러고 나니
몸과 마음이 피폐할 대로 피폐해졌다.
토요일엔 일이 비교적 일찍 끝이나서
나머지는 직원들에게 맡기고 용수철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튀었다.
지옥으로부터의 탈출.
집에 가는 길에 큰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냉면 먹고 싶으면 냉면집으로 오라고-----
큰 딸은 냉면을 좋아하니 딸은 냉면 한 그릇 사주고
나는 그 집에서 육개장 한 그릇 뚝딱 해치울 생각이었다.
그랬더니 딸 아이는 Celina가 파스타를 준비하는 중인데
나도 원하면 먹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 그렇지.
Celina가 우리집에 머물고 있는 걸 깜빡했다.
Celina는 큰 딸의 고등학교 친구인데 이탈리아에 가서 살고 있다
큰 딸의 소꿉친구인 Allison의 결혼식에 오느라고
우리집에서 열흘 정도 머물고 있는 Celina가
정통 이탈리아식 파스타를 요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난 돈 주고 먹으라고 해도
파스타에는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냉면집에 가서 육개장 한 그릇 흐뭇하게 비울 생각은 산산히 날아갔다.
냉면집이긴 하지만 육개장 맛 또한 훌륭하다
한 주일 동안의 내 노고를 육개장으로 위로하려던 계획이 빗나가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맛이 휼륭해도 그렇지
별로 넓지 않은 냉면 집에서 혼자 한 자리 차지하기엔
내 염치가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빠는 햄버거 하나 사 먹고 들어갈테니 걱정하지마."
이럴 때 햄버거 한 조각은
나에게 있어서 괴테가 말한 ' 눈물 젖은 빵 한 조각'에 가깝다.
물론 생존이 아닌 생활의 차원이긴 하지만------
Closter의 버거킹에서 햄버거 하나를 사서
운전하며 한 입 베어 먹으며 하늘을 보니
해와 구름이 만들어내는 경치가 경이로왔다.
구름이 해를 살짝 덮었는데
예사롭지 않은 빛내림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기대감으로
심장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먹는 일이고 뭐고 빨리 사진 찍기 좋은 자리를 찾는 일이 급했다.
집으로 오는 중간중간 좋은 자리를 눈을 흘금거리며 찾아보았지만
나무나 집 같은 것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어서 실망스럽던 차에
Norwood 기찻길 지나기 전에 공터가 눈에 들어왔다.
하늘이 비교적 넓게 보이는 곳이어서 황급히 차를 그 쪽으로 돌렸다.
기찻길 옆에 차를 세우고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리는데
기대와는 달리 구름과 해가 서로 숨바꼭질만 했지
내가 원하는 결정적인 순간을 만들어내지는 않는 것이었다.
30분 동안 이제나 저제나 하며
시간을 죽였다.
우리 Sadie 보는 시간 30분을 손해 보았다.
햄버거도 하늘을 지켜 보다가
한 입씩 먹었다.
눈이 부시니 실눈을 뜨고 보았다.
끼니를 때우는 것이 의무가 되어 힘이 들었다.
먹는 건지 뭐하는 건지도 모르는 사이에
햄버거 하나를 다 먹었다.
이렇게 한 끼를 허무하게 때웠다.
너무 오랫동안 하늘을 바라보아서인지
집으로 가는 길에 사물이 노랗게 보였다.
언젠가 들었던 황반 현상이 아닌가 하여
덜컥 겁이 났다.
집에 도착할 때 쯤 사물이 정상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면서
황반현상의 공포는 사라졌다.
정작 보고 싶은 차력이나 원숭이 묘기는 보여줄 듯 보여주지 않고
약만 파는 약장수에 속아서 오금 저려가며 기다리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결국 하늘에 속았다.
지난 주 망울만 맺혔던 작약(?)이
제법 성숙하게 피어나 날 맞아주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Celina가 만드는 이탈리아 음식에 소요되는
소스며 스파이스 냄새가 호화로왔다.
그리고 신장에 올려진 Sadie의 신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호화찬란한 허브와 스파이스 냄새보다도
Sadie의 신을 보는 순간 사랑스런 느낌이 눈 속으로 빨려들어왔다.
"사랑은 길들여지는 것이다."
어린 왕자와 친구가 된 여우의 눈에
어린 왕자의 노란 머리와 같은 색의 누런 밀밭을 보아도
어린 왕자가 생각나며 그리워진다.
그렇게 사랑은 길들여지는 것이다.
내가 들어가는 기척에
강아지(강아지라고 하기엔 이미 늙었다.)들이 짖어대자
Sadie가 반갑게 날 맞는다.
"하부지"
그 한 마디가 뭐라고------
감격스럽게 Sadie가 사랑스럽다.
Sadie를 안아 번쩍 들어 올렸다.
아주 둥글고 커다란 웃음이 공중에서
꽃앞처럼 내게 떨어졌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Sadie가 현관 쪽을 향해
"함무니"하고 불렀다.
함무니는 거기 없었다.
그렇지 토요일 집에 오는 길이면
내가 먼저 집으로 들어가고
텃밭을 둘러본 아내는
Sadie와 내가 인사를 끝낼 때 쯤 들어오곤 했다.
Sadie는 그 패턴을 알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은밀한 공식을 만드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우리만의 언어.
오지도 않은 '함무니'를 부르는 Sadie와
그걸 알아듣는 나는
참 많이 길들여진 사이가 되었다.
난 토요일에 집에 들어가면
Sadie가 잠이 들 무렵부터는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를 줄겨 본다.
불후의 명곡을 보다가 French Door를 통해 부엌 쪽을 보니
Celina는 여전히 요리를 하고 있고
Sadie도 저녁 먹을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어는 순간 Sadie가 재채기를 했다.
재채기 하는 모습도 사랑스럽다.
얼마 후 요리가 하나하나 완성되기 시작했다.
나보고 와서 먹으라고 했다.
하몽(스페인에서 돼지 다리를 햄츠로 만든 것을 이르는 말)과 멜론이 먼저 눈에 띄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나 스페인 사람들은 거의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음식이다.
이탈리아에 가서도 먹었고, 스페인에 가서도 먹었다.
하몽을 멜론에 싸서 먹는데
난 멜론만 좋아한다.
하나 집어 먹고 영혼은 없이 과장된 어투로
"So great!"라고 말하며
내 자리로 돌아왔다.
거짓말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얼마 후 사위도 퇴근해서 식사를 하는데
와인까지 곁들여 제법 근사한 식사를 하는 것 같았다.
프렌치 도어의 유리창 저 쪽에서
이탈리아 음식을 맛 있다고 먹는 그들이 갑자기 낯이 설었다.
'Glass Wall'
벽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데도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들이 창 저 쪽에서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며
와인까지 곁들인 식사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창 저 쪽의 모든 사람들이 서먹서먹해지기 시작했다.
내 집에서 느끼는 손님 같은 외로움.
아내가 그리웠다.
같은 음식을 먹으며 함께 살아온 그 시간,
그리고 그녀가 없는 빈 공간이 그리워진 것이다.
'불후의 명곡'이 끝나고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네 시엔가 잠이 깼다.
그럭저럭 시간을 때웠다.
날이 밝아 오자 창 밖을 내다 보았다.
흐렸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비구름은 그리 가까운 곳에 있지 않았다.
적어도 축구가 끝날 때까지는 저 멀리 어디선가에서 서성이며
축구 끝나길 기다려 줄 것 같았다.
마음을 놓았다.
날이 흐려서 잔디밭엔 이슬이 내리지 않았다.
잔디는 약간의 습기만 머금고 있어서 발이 젖지는 않았다.
거의 스무 명 가까운 인원이 모였다.
경기 막판에 Alex가 빈 공간에 찔러준 공을
내가 상대편 수비의 off side 라인을 무너뜨리며
쏜살같이 달려가 한 골을 넣었다.
(다른 사람의 객관적 눈으로 보면 쏜살 같았는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내 느낌이 그랬단 말이다.)
-와우, 나 아직 살아있네.-
그렇게 둥둥 떠 있던 마음도 잠깐.
아침 끼니 걱정이 되었다.
집에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나오니
큰 딸이 Sadie와 함께 부엌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와플을 굽고 있었는데
아직 냉장고에 와플이 두 개 더 남았으니
원하면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어젯 저녁 창 저 건너에 있던 큰 딸이
내 곁으로 다시 돌아온 것 같이 반가웠다.
달걀 후라이 두 개와 함께 캐나다 산 메이플 시럽을 얹은 와플은
아침 식사로 훌륭했다.
와플 한 조각을 떼어 Sadie를 주니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행복한 한 끼를 이을 수 있었다.
원래 일요일 아침 식사 후엔 나 홀로 하이킹을 갈 생각이었다.
비가 올 것을 알고 있으니 무턱대고 떠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예전 같으면 그럴 수 있었겠지만
이젠 내가 가는 길에 카메라도 함께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젖어도 되지만 카메라 님은 젖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손에 쥐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내 소유라는 말 이전에
내가 그 것의 노예가 되었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다.
카메라의 노예
딸에게 다시 날씨를 확인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비 올 확률이 50%란다.
나야 비를 맞아도 되지만
카메라 때문에 깔끔하게 하이킹을 포기했다.
오전엔 지하실에 내려가
정말 오랜 만에 음악을 들었다.
1812년 서곡,
교향곡 이탈리아
슬라브 행진곡,
Sarah 가 연주하는 Paganini Violin Concerto 1번-------
조수미가 부른 기차는 여덟 시에 떠나네를 비롯한노래 몇 곡
마음이 부자가 된 것처럼 뿌듯한 마음으로 위로 올라 왔다.
딸은 Celina와 함께 외출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점심 먹으러 나가게?"
이럴 때 점심 사 준다고
같이 따라나서면 안 된다는 것 쯤의 눈치는 내게도 있다.
꼼짝 없이 내 집 안에서 또 외로와졌다.
라면 같은 것 있냐고 물어보았더니
여기저기 뒤적뒤적거리더니
짜파게티 몇 봉지를 꺼내 놓았다.
일요일 점심은 짜파게티 한 개로
겨우겨우 때울 수 있었다.
끼니를 걸러서는 아니 되었다.
아내가 없이도 한 끼니도 거르지 않으리라는 서원을 이미 세워 놓은 터였다.
만약의 비상사태(?)를 대비해서
홀로서기 연습을 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일이니 말이다.
짜파게티 한 봉지로 또 한 끼를 때웠다.
씽크를 들여다 보니
어제 저녁부터 쌓인 접시며 그릇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아이들은 Dish washer를 사용하지만 난 아내의 방식을 따라
손으로 설거지를 한다.(사실은 Dish Washer의 작동법을 모른다.)
달리 해야할 숭고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천천히 설거지를 시작했다.
설거지를 해 본 사람은 안다.
처음에 시작하기가 엄두가 안 나서 그렇지
설거지가 다 끝난 후 접시나 그릇에서
'뽀드득'하고 나는 명랑한 소리를 들으면서
설거지는 머리가 복잡할 때 할 수 있는
아주 건전하고도 보람이 있는 오락이 될 수 있다는 걸 말이다.
오후 두 시쯤 세 여자가 돌아왔다.
집에 들어오면서 딸아이는 내게 물었다.
세시 반부터 한 시간 가량 Sadie를 보아줄 수 있냐고.
달리 하는 일이나 할 일도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러마고 했다.
그러면서 또 외로와졌다.
Sadie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인데 행복하기는 커녕 왜 외로와졌는지
그 기분은 지금까지도 설명할 길이 없다.
그리고 딸과 Celina는 집을 나섰다.
이탈리아로 가기 전에 nail salon에 다녀온다고 했다.
Sadie는 낮잠을 잔다고 했다.
잠시 컴퓨터를 켜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30여 분이 지났다.
잠 자고 있을 Sadie를 보러 윗 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어느새 Sadie는 일어나 혼자서 놀고 있었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이쁜 것.
혼자 일어나 울지도 않고 놀고 있는 Sadie는 천사가 아니고 그 무엇이란 말인가.
Sadie를 안고 아랫 층으로 내려오고 얼마 되지 않아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Sadie를 옆에 앉히고 비 구경을 했다.
얼마나 열심히 쏟아지는지 한 시간 후에 대충 비가 그친 뒤
데크의 물통을 보니 2"가 넘게 내린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5월 한 달 비가 한 번도 내리지 않았다.
고마운 비.
그런데 그렇게 쏟아지니 두려운 감정들이 몰려 왔다.
가게가 새지 않을까 하는 걱정 같은 것들이다.
여러 번 비가 새서 피해를 입었던 경험들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겼다.
데크에 내리는 비.
이건 아주 바가지로 쏟아 붓는 것 같았다.
거실에서 바라본 도로
도로 가장자리엔 물이 물밀듯이 흘렀다.
거실 창문에도 빗방울이 튀었다.
비가 잠시 그친 후의 데크 모습.
그러다 보니 딸과 Celina가 돌아왔고
나는 한인 성당으로 주일 미사를 하러 갔다.
기찻길 옆의 물레방아가 있던 집은
마당 반까지 물에 잠겼다.
미사가 끝나고 나서 집에 돌아가면
또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끼니를 잇는 일이 보통 어렵고 부담스러운 것이 아닌 것이다.
혼자 있으면 그냥 저냥 때우면 되지만
누구와 함께 있으면 그 사람까지 신경을 써야되기 때문이다.
딸 아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단 집에 가서 딸 아이와 무얼 먹을지 상의를 해서
피자나 중국 음식을 먹겠다면 주문을 해서 먹을 요량으로
집으로 갔다.
딸 아이는 윗층에서 무언가 하고 있는 듯 했다.
딸아이에게 문자로 Brooklyn으로 나간다고 알렸다.
부담을 주기 싫은 까닭이었다.
집을 나서고 얼마 뒤에 답장이 왔다.
Sadie 목욕 시키고 있었는데 아빠 저녁 식사는 어찌 할 거냐고.
아빠는 걱정하지 말라고 답장을 보냈다.
그럽고 보니 한 끼 때우는 일이 부담스러웠다.
토요일에 버커킹에서 햄버거를 사면서 보아 두었던 메뉴가 있었는데
바로 'chicken fry'였다.
따로 식당에 앉아 먹을 필요도 없이 운전하며 한 끼 때우기론 안성 맞춤이었다.
버거킹 Drive through에서 chicken fry를 주문했다.
굵게 썬 french fry 처럼 생긴 chicken fry 일고 여덟 개가
작은 박스 안에 들어 있었다.
핫소스에 찍어 하나를 입에 넣었다.
웬 부드러운 소금 덩어리 하나가 입 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그러나 어찌하랴
한 끼 때운는 숭고한 일을 여기서 중단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꾸역꾸역 다 먹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며
"이제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것처럼
나도 끼니 때우는 일을 다 이루었다.
넋두리는 하루 더 이어질 에정이었으나
넋두리 하는 내가 지쳐서 여기서 멈추어야 겠다.
내가 이리 힘이 드는데 듣는 사람은 얼마나 짜증나고 힘이 들겠는가.
워낙 넋두리라는 것이 주저리 주저리
요점도 줄거리도 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지만
넋두리 하는 내가 생각해도 너무 했다.
결국은 아내의 빈 자리가 너무 크다는 것,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자식들도 포함해서)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 밥상을 마주할 수 있는
가까운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그것이 내가 하고 싶었던 넋두리의 처음이자 마지막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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