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기의 꿈
우리 집의 막내인 민기는 별 어려움 없이 평범하게 자랐다.
다만 학과 성적이 처지는 게 좀 걱정이 되긴 했다.
학교 공부엔 별 취미가 없었고 자연히 성적도 아마 하위권이었을 것이다.
아마라고 자신없이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아이들 성적표를 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위로 네 아이들은 적어도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학군 좋다고 한국까지 소문난 학교에서
honor class에서 공부를 했으므로
대학가는 걱정을 해본 적이 없으니 성적표를 볼 필요가 없었다.
위의 네 아이들에 비해 막내 아들은
전 과목 다 보통 class에 들어 있는데다가
가끔 숙제도 안 해가서
학교로부터 부모 호출을 당할 때도 있었으니
자연 공부를 못하는 축에 속해 있었다.
그러니 성적표를 아니 보는 것이 더 나으니
애써 외면하며 보질 않았다.
그런데 민기도 잘 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음악이었다.
어릴 때부터 음악에 대한 소질이 보였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는
누나들이나 형은 몰라도
민기는 모른는 것이 거의 없이 외워서 다 따라 부를 정도였다.
그래도 그 때는 그러려니 했다.
고등학교 졸업이 가까와지면서
대학을 가야 하는데 학과 성적으로는
좋은 대학으로의 진학은 영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서 결국 음대로 진로를 결정했고
결론적으로 학과 성적은 그리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Juilliard의 Pre-college에서 Basoon을 전공하고 있었으니
웬만큼 명성 있는 음대는 갈 수 있을 것임으로
공부는 전혀 걱정거리가 되질 않았다.
음대로의 진학은 우리 식구 모두의 걱정거리를 없애주는
신의 한 수였다.
그렇게 진학할 대학을 알아보던 중
아내가 누군가에게
한국에서는 음대출신의 ROTC 장교가
군악대를 지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혹시 그런 과정이 있는 음대를 알아보라고 막내에게 이야기를 했다.
결국 민기는 해병대 군악대에 지원을 했다.
군악대에서 4년 동안 열심히 연습을 하고
나중에 대학을 가도 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열심히 연습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민기가
대학에 가서 자칫 방종으로 흐르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해병대 지원에 한 몫을 했다.
규칙적으로 체력단련을 하고
악기 연습을 한다면 더 이상 좋을 순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민기는 해병대에 지원을 했고
열심히 한 덕에 남들보다 빨리 진급을 했다.
처음엔 그런가 보다 했다.
열심히 근무한 결과로 일찍 진급했다고 하는데
뭐라 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더니 작년에 자기에게 꿈이 있는데
해병대의 DI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DI는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필요로 하기에
틈만 나면 체력단련을 하며 몸을 만든다고 했다.
열심히 해서 남들보다 빨리 진급한 것도
DI가 되기 위한 포석일 수도 있었다.
배신을 당한 느낌이었다.
4년 복무를 마치고 사회로 돌아올 것을 기대했는데
사병으로 4년을 더 복무연장했다는 소식은 참으로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병과도 바꾸고 DI를 지원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차근차근 마친 뒤였다.
계급도 체력도,
무엇보다도 민기의 의지까지도
완벽하게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석달 동안의 힘든 과정을 거치고
마침내 민기는 미 해병을 육성하는 DI가 된 것이다.
민기는 아마도 미 해병대 역사상
가장 어린 DI 중의 하나로 꼽힐 수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바로 입대를 했고
누구보다도 일찍 진급을 해서 sergeant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마 민기는 훈련병 시절 DI가 되려는 꿈을 키운 것 같다.
그리고 그 꿈을 향해
필요한 준비를 착착 해낸 것이다.
아무런 꿈과 목표도 없이 표류하는 삶을 살았을지도 모를 민기에게
꿈이 생긴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일들을 스스로 준비하고
실행한 것이 참으로 자랑스럽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겪어야 했던 험한 과정을 기꺼이 겪어낸 것도
참으로 칭찬 받을만 하다.
처음엔 민기가 가진 꿈을 평가 절하했다.
나도 장교로 근무했고
나의 아버지도 대령으로 예편하셨다.
이왕이면 장교의 꿈을 가질만도 한데
사병으로 남는다는 것에 다소 실망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꿈이었다.
중요한 것은 민기의 꿈은 민기가 꾸어야할 것이며
누구의 꿈보다도 자신의 꿈이 소중한 것이라는 거다.
아무런 꿈이 없던 민기에게
꿈이 생겼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는 것 또한 여간 행복한 일이 아니다.
벌써 두 개의 꿈을 이룬 민기의 다음 꿈은 무엇인지
아주 궁금해지는 요즈음이다.
-이오지마 섬에 성조기를 게양하는 미 해병대 상 앞에서-
민기는 훈련병에게 자신이 사진 찍히는 모습이 보여서는 안된다며
상당히 조심스러워 했다.
DI에게는
훈련병들에게 해병 이외의 어떤 인간적인 요소도
드러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DI 모자.
훈련병에게는 공포 그 자체의 상징이다.
졸업식 전, 주인을 기다리는 모자.
그 모자는 머리에 쓰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훈육관에게 모자를 받아
정확하게 쓴 다음,
DI 훈련대장에게 거수경례로
DI 신고식을 마침
나는 사진 찍느라고 듣질 못했는데
민기는 그동안의 힘들었던
이야기를 했단다.
너무 열심히 하느라 몇 가지 규정을 위반했는데
모두 용서를 받았다는 이야기였다.
예를 들어 신병 훈육 실습을 하는 동안
소리를 지르면 안 되는데
과도하게 소리를 지르는 등등(민기의 목은 아직도 쉬어 있다.)----
그 동안 몸과 마음 고생을 많이 한 것 같았다.
큰 아들 준기와 민기
사진을 찍는데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챙 넓은 모자를 쓴 민기는 모자를 꼬옥 붙들고----
(어떻게 머리에 얹은 모자인지 그 가치는 민기가 제일 잘 알 것이다.)
저 뒤 철탑 위의 탱크에 쓰여 있는
'WE MAKE MARINES"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이 문구는 Paris Island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제부터 우리 아들 민기의 손으로
미 해병을 만들 것이다.
무심히 보던 그 문구가 생명을 갖고
내게 말을 걸어온다.
Stella와 Brian도 사진 찍기에 열중.
나도 해병대 식으로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아들과 한 장.
셋이서 해병대 식으로--
민기의 다음 끔은 무얼까?
신병들이 처음 이 곳에 도착해서
저 문을 통과하는 순간부터
해병대 훈련소 일정은 시작된다.
DI들의 침 튀기는고함소리로 훈련병들의 혼을 빼는 곳.
해병 신병 훈련을 마치고 이곳에서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언제고 다시 이 곳에서 다시 사진을 찍을 일이 있을 지 모르겠다.
다음은 민기가 입대하기 전에 썼던 글입니다
.http://blog.daum.net/hakseonkim156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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