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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강, 강물 소리 - 장모님을 기억하며

강, 강물 소리- 장모님을 기억하며

 

내가 처음으로 죽음을 만났을 때가 언제였을까?

 

아마 내가 학교 들어가기 전이었을 것이다.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서 크고 있었을 때였다.

하루는 뜬금없이 할머니에게 이렇게 물었던 기억이 있다.

 

"할머니 내가 크면 어떻게 돼?"

"장가가고 애 낳고 살지."

"그리고 더 나이가 들면?"

"그다음엔 죽지."

 

나는 시간이 지나면 내 존재가 소멸한다는 것이 슬프고 처절하게 아팠다.

그래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그 나이의 아이가 가질 수 있는 그런 슬픔의 무게로.

그러나 마주했던 그때의 죽음은 그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현상적인 죽음을 대면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학교 수업 도중 같은 집에 살고 계시던 할아버지의 부고를 들었다.

정확한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친척 어른들의 말씀으로는

할아버지의 주검 앞에서 내가 "그렇게 슬피"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방에서 군대생활 할 때 할머니의 부고를 들었다.

상관에게 며칠 할머니 장례를 위해 다녀오겠다고 보고를 했지만 

지휘관도 연대 인사장교도 미적거리며 임시 휴가증 발급을 꺼려했다.

겨우 휴가증을 받고 장지인 강원도 영월까지 서둘러 갔지만

이미 장례는 모두 끝나고 가족들이 서울로 돌아가려던 참에야 도착을 했다.

어린 시절 나를 키워주신 할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나는 그저 무덤덤했던 것 같다.

 

나를 낳아주셨던 어머니는 1999 년에 돌아가셨다.

솔직히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큰 슬픔을 느끼진 못했다.

단지 어린 자식과 헤어져 혼자 살아야 했던 어머니의 시간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슬픔보다는 훨씬 컸던 것 같다.

그리고 아버지는 2013년에 돌아가셨는데 장례를 치르고 

집에 돌아와 매일 아침 일어나 석 달 동안 아버지를 위해 연도를 드렸다.

그 석 달 동안 많이 울었고 아버지와 화해를 했고, 아버지를 이해했다.

 

그리고 이 달 15일에는 장모님이 세상을 뜨셨다.

남편과 자식들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주시고,

또 그만큼 존경과 사랑을 받으셨기에 그분의 죽음을 통해

아름다운 모습으로 또 다른 세상으로 삶의 거처를 옮기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영혼의 이사가 곧 죽음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장모님의 죽음을 통해서였다.

 

그런데 며칠 전 우연히 칼릴 지브란의 글(시)을 마주할 기회가 생겼다.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의 두려움(Fear)에 대한 글인데

그의 작품집 '예언자의 정원'(The Garden of the Prophet)에 나온다.

"바다에 들어가기 전에 강은 두려움에 떤다고 하지요.

강은 자신이 지나온 길을 되돌아봅니다. 산의 정상에서 시작해서 숲과 마을을 가로질러 굽이굽이 기나긴 길을 흘러왔습니다.
그리고 강 앞에는 너무나도 광활한 바다가 펼쳐져 있어서, 그곳에 들어가는 것은 마치 영원히 사라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다른 길은 없습니다.
강은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되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되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강은 바다로 들어가는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 순간을 마주할 때만 두려움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강은 자신이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바다가 되는 것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It is said that before entering the sea, a river trembles with fear.
She looks back at the path she has traveled, from the peaks of the mountains, the long winding road crossing forests and villages.
And in front of her, she sees an ocean so vast, that to enter there seems nothing more than to disappear forever.
But there is no other way.
The river cannot go back.
Nobody can go back.
To go back is impossible in existence.
The river needs to take the risk of entering the ocean because only then will fear disappear, because that's where the river will know it's not about disappearing into the ocean, but of becoming the ocean.”

 

이 글은 잔잔하게,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은 강도로 내 가슴을 두드렸다.

 

우리 식구는 30여년 전 브루클린에서 뉴저지 해링톤 파크로 이사를 갔다,

새로 이사한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Piermont라는 곳이 있는데 짬이 있을 때 자주 찾아가곤 했다.

갈대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허드슨강을 지르는 Pier에 이르게 된다

갈대 서걱대는 바람소리와 깊은 강물소리를 듣으며 묘하게도 지친 영혼이 위로받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래서 나는 Piermont를 지상에서의 '내 영혼의 고향'이라고 부른다.

나는 Piermont를 찾을 때마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의 주인공처럼

강물소리를 들으려 애썼다.

그러나 강은 늘 침묵했다.

 

나는 20대에 읽었던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달타 중에 그가 강물소리에 귀 기울이는 장면을 희미하게 기억한다.

“강물은 모든 소리를 담고 있었다. 기쁨의 웃음소리, 슬픔의 울음소리, 작은 아이의 외침, 남자와 여자의 탄식, 천둥소리와 부드러운 속삭임. 강물의 소리는 하나의 단어로 수렴되었다. 그것은 ‘옴(Om)’이었다. 완전성을 나타내는 단어, 완성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도 싯다르타가 들었던 그 강물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장모님이 세상과 이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강물 소리를 조금은 들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강물은 바다가 가까워지면서

더 깊어지고 그 깊이만큼 더 침묵한다.

발버둥 치지 않고 조용히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허드슨 강의 깊은 침묵의 소리.

장모님은 최근 몇 달 동안 그 침묵의 소리를 들으셨던 건 아닐까?

 

언제고 Piermont에 가면 가만히 서서

칼릴 지브란의 표현대로 '귓속의 귀'로

강물이 '입속의 입'으로 말하는 그 깊은 침묵의 소리를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