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찬 손 - 옛날이야기
어제 메트로 폴리탄 오페라가 연주하는
'라 보엠'을 관람했다.
15 년 전인가에도 같은 곳에서 '라 보엠'을 관람한 적이 있었는데
다시 같은 오페라를 보게 되어서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됨을 느꼈다.
그때는 아내도 나도 정신없이 일하고 가사 때문에
정신이 없을 때였다.
Valentine's Day 선물이라며
아이들에게 받은 티킷으로 시간을 내어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었다.
'라 보엠'의 1막에 그 유명한 아리아 '그대의 찬손'이 나오는데
나는 그 노래를 들으며 아내의 손을 잡았던 것 같다.
아래층에 사는 미미가 촛불의 불을 얻으러
가난한 시인 로돌프의 방을 찾았다가
모두의 촛불도 꺼지고 미미는 자기 방 열쇠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대의 찬손'은 어둠 속에서 열쇠를 찾기 위해 바닥을 더듬다가
서로의 손이 마주치고, 미미의 손이 너무 차갑다며
로돌프가 미미의 손을 감싸 녹여주며 부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리아 중의 하나이다.
한 때는 가늘고 흰 여자의 손이었었는데-----
아내의 손,
다섯 아이들의 손이 되어
몇십 년을 살다 보니 손가락도 휘고
퇴행성 관절염으로 고통을 받기도 한다.
나는 지금 그대의 찬송을 감싸주며 살고 있을까?
예전에 '라 보엠'을 관람하고 돌아와서 쓴 글을 소개한다.
그대의 찬 손
여보, 사랑하는 나의 신부, 나의 누이, 그리고 어머니, 나의 딸이여!
얼마 전, 당신과 함께 오페라 ‘라 보엠’을 보러 갔을 때
‘그대의 찬 손’이라는 아리아를 들으며
당신을, 그리고 당신의 손을 생각했습니다.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당신의 손을 감싸,
내 코트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신혼의 첫겨울이 생각나요.
내 주머니 안에 있는 당신의 작고 앙증맞은 손을 녹여주며,
눈길을 밟고 다녀오던 매일 아침미사,
그 겨울, 그 사랑----그때를 생각하니 마치 벽난로에 불을 지핀 듯 가슴이 따뜻해지네요.
그때는 당신의 손이 그렇게 차가운 줄을 몰랐어요.
아니, 당신 손을 잡고 있다는 행복감 때문에 내 손의 감각이 무뎠는 지도 모르지요.
그런 행복도 잠깐, 그 해 겨울을 보내면서, 당신도 미국으로 떠나보냈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또 하나의 겨울은 왜 그리도 춥던지요.
코트 주머니는 너무나 헐렁하게 느껴졌고 휑하니 바람만 출렁이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과 헤어진 지 일 년 후, 나도 당신과 함께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지요.
그렇지만 도착한 다음 날부터 시작된 미국에서의 삶의 무게는 왜 그리 버겁던지....
우리의 꿈과 사랑을 서로 꺼내 보이고 나눌 여유도 없이
시간은 택시의 미터기처럼 털거덕 털거덕…
그렇게 쉽게, 그리고 무심하게 지나갔습니다.
어느새 우리 사이엔 아이들이 다섯이나 생겼고, 나는 가장으로서 의무 때문에,
당신은 아내나 연인으로서가 아니라 엄마의 역할을 해내느라 더더욱 정신없이 살았지요.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는 생각이 없으니 그렇게 고단한 일을 계속할 겁니다.
우리의 삶도 다람쥐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삶에 여유가 있었더라면, 그래서 생각할 시간이 주어졌더라면,
미국에서의 생활을 벌써 접어버렸을지도 모르지요.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고 숨을 돌릴 여유가 생기고 나서야
비로소 당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눈가엔 세월의 나이테가 비치더군요.
아, 그리고 당신의 손…….
옛날 생각으로 잡아본 당신의 손 때문에 깜짝 놀랐지요.
마치 낯선 사람의 손 같았으니까요.
당신의 손은 내 손안에 들어오기엔 너무나 투박하게 커져 있었습니다.
당신 말로는 아이를 많이 낳아서 뼈가 온통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했지요.
당신의 손은, 차고 더 이상 매력이 없어졌지만.....
그래도 가끔 당신 손을 잡을라치면 슬그머니 손을 빼는 당신을 바라보면서
세월이 가면서 우리의 사랑도 빛바랜 사진처럼
그렇게 퇴색되어 가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릿해졌습니다.
며칠 전, 다시 ‘그대의 찬 손’을 들으며 생각했지요.
사랑은 사랑을 넘어설 때에만 진정한 사랑이라는 걸 말이지요.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내가 당신의 손을 잡으려 할 때,
당신이 손을 뺀 것은 나를 거절하려는 것이 아니었음을 말입니다.
오히려 당신은 차고 투박한 손을 미안해했던 거죠.
여보, 미안하고 부끄러운 건 당신의 손이 아니라
당신의 손보다도 더 차고 투박한 나의 마음입니다.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작고 따스한 손뿐만 아니라,
오히려 차고 투박한 손 까지도 감싸주고, 녹여주며
그 손에 입 맞추어야 함을 말입니다.
지천명을 바라보는 이 나이가 되어서, 사랑은 껍질을 깨어야 진정한 사랑이며,
그렇게 사는 것이 하늘의 뜻임을 깨닫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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