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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 나의 기도

달리기, 나의 기도

더 미룰 수가 없었다.

 

앞으로 두 달 후에는 half marathon을 뛰어야 하는데

날씨 핑계로 아직까지 구체적인 연습을 하지 않아서

기말고사를 앞두고 아무런 시험공부를 하지 않은 것 같은

불안감을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요즈음이다.

 

둘째 딸은 생일에 half marthon을 뛰는데

작년에는 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던

딸아이의 마음과 함께 한다는 의미에서 나도 함께 뛰었다.

그런데 1회로 끝났으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수도 있었던 half marathon을

올해에도 이어지게 하려는 모종의 음모가

나도 모르고 실행되고 있음을 감지한 것이 한 달 전이다.

 

둘째 딸이 자기 집으로 브런치를 하자고 초대를 해서 갔더니

브런치만 준비한 것이 아니라

달리기에 필요한 바지와 셔츠, 운동화까지 마련해서

집으로 돌아올 때 내게 선물을 한 것이다.

나는 이미 달리기에 필요한 운동화며 복장은 다 갖추고 있는데

새로운 기어는 선물이 아니라 짐이 되어 나를 옥죄는 것 같았다.

 

아마도 내가 올해에도 둘째 딸아이의 생일에

half marathon을 뛸 거라는 걸 발설한 것은

아마도 아내일 것이다.

나의 생각과 의지, 결심까지도 주관하는 아내가

둘째 딸에게 아빠가 올해도 함께 뛸 거라는 걸

아무 생각도 없었던  내 의사와 무관하게 이야기했음이 틀림없었다.

내 입으로 말하지 않았음에도 딸아이가

달리기와 관련된 물품을 준비한 것이 그 증거다.

 

달리는 일이 그리 즐겁고 입맛 다실 일은 아니나

길다면 긴 시간을 딸과 함께 하며

무언의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니

올해도 half marathon을 뛰기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마음속으로 결심을 했다.

 

그래서 더 미루지 않고

오늘 아침을 거사일(?)로 잡았다.

그런데 두려움이 밀려왔다.

작년 이맘때보다 몸무게도 7-8 파운드가 늘었고

나이도 한 살 더 먹어서 잘 뛰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복장을 갖추고 문을 나서는데

아내가 한 마디 했다.

 

"뛰면서 이영주 선생님 생각하세요."

 

아내와 자매처럼 지내는 수필가이 이영주 선생은

지금 중환자실에서 고통 중에 있는데

딸 셋은(Ahn Trio) 연주 일정도 취소하고 병원으로 달려올 정도로

위중한 상태라고 들었다.

 

3 주 전에 우리 집이 있는 116 스트릿에서 45 스트릿까지

왕복으로 뛴 적이 있어서

오늘은 지난번보다 10 스트릿만 더 뛰려고 마음을 먹었다.

 

아침 8 시 5 분에 천천히 출발을 했다.

달리기 하기에는 최적의 날씨였다.

춥지도 덥지도 않고 바람도 그다지 세지 않았다.

 

처음 15 분은 천천히 달렸음에도 호흡이 가빴다.

포기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는 게 바로 이 때다.

board walk를 마주 달리는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60 스트릿까지 달리니 그 이후에는 사람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마음속에 반환점으로 마음속으로 정했던

35 스트릿에 이르자 마음이 흔들렸다.

 

"여기서 돌아갈까?"

 

그런데 집을 나올 때 아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뛰면서 이영주 선생님 생각하세요."

 

달리는 고통 속에 잠겨 있느라

깜빡 잊고 있던 이영주 선생 생각이 번쩍하고 떠오른 것이다.

 

그 이후로는 이영주 선생을 기억하며 뛰었다.

board walk는 9 스트릿에서 끝이 난다.

최종 반환점을 만난 순간의 기쁨이란-----

 

이영주 선생이 겪고 있는 고통이

내겐 힘이 되어서 당초 목표보다 왕복 50 스트릿을 더 달릴 수 있었다.

반환점을 돌아 80 스트릿에 이르자

다리가 무겁고 피곤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 호흡의 가쁨과

다리의 피곤함을 봉헌합니다.-

 

가쁜 숨을 마시고 내뱉으며,

고단한 다리를 쉬지 않고 움직이며 이영주 선생과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기억했다.

 

오늘 아침에 뛴 거리는 대충 12 마일 가량 되는 것 같다.

8 시 5 분에 시작해서 9 시 45 분에 달리기를 마쳤다.

100 분 동안 20 킬로 미터가 조금 안 되는 거리를 달렸다.

몸무게를 재어 보니 뛰기 전보다 2 파운드 가량 줄었다.

 

작년보다 다리가 더 아픈 것 같다.

 

내 작은 아픔이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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