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축구 그만 해!!!"
아내의 입에서 언젠가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알았으나
막상 듣고 보니 가슴속에 살얼음이 어는 것 같았다.
아파트에서 새집으로 이사 오면서
참 많은 것을 버렸는데
많은 버릴 것 중의 하나인
검은 플라스틱 보따리를 슬쩍 열어보았을 때
아내가 내게 했던 말이
바로 "이제 축구 그만 해!"였다.
얼핏 보니 그 안에는
내가 아끼고 잘 신지 않던
흰색의 아디다스 축구 양말도 있어서
이걸 왜 버리냐고 볼멘소리를 했더니
아내에게서 돌아온 반응이었다.
환갑 고개를 넘어서면서
심심할 사이도 없이
아내에게서 축구를 그만두라는
회유와 협박을 받았는데
별 부담감을 갖지 않아도 될 정도의 강도를 가진 것이었다.
"이제 축구 그만 하고 나랑 등산이나 다녀요."라든지
"이제 축구 그만 하세요, 다치면 큰 일 나요."라며
꼬박꼬박 존대를 하며 명령을 하긴 했으나
구속력을 갖출 정도의 어조는 아니어서
귓전으로 흘리곤 했다.
그런 아내의 입에서
솜털 같던 강도의 축구 그만두라는 명령이
금강석의 세기로 바뀌었고
축구 용품을 과감히 버리는 행동으로 구체화된 것이니
큰일이 난 것이다.
하기야 이제 축구를 그만 둘 나이가 되긴 되었다.
나보다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 축구를 하다 보면
도움이 도기보다는 도움을 받는 입장이 되니
슬슬 자리를 비켜주어야 하지만
축구와 또 일주일에 한 번 사람들과 어울리는
재미를 포기할 수 없어서
지금까지 축구장에 나간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 사태로 거의 일 년이 다 되어가도록
축구를 하지 못하고 있으니
점점 노쇠해 가는 이 몸과 정신이
이젠 정말 축구와 이별을 할 때가 온 것 같은
슬픈 예감이 든다.
더구나 이젠 축구장까지의 거리가
더 멀어져서 시간적으로
마음의 짐이 늘었다.
축구와의 이별은
같이 축구를 했던 동료들과의 이별이기도 하고
나의 땀과 기억들이 배어 있는
운동장과의 이별이기도 한 것이다.
시간과 공간과의 이별
이별에 익숙해져야 하는
나이가 되긴 했어도
여전히 이별은 슬프다.
그런데 아내가 모르는 것이 있다.
양말은 아무 거나 신으면 되는 것이지만
우리가 살던 브루클린 아파트 건물 입구의
외진 곳에 아직 나의 축구화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신에게는 아직 멀쩡한 축구화 두 켤레가 남아 있사옵니다."
요즈음 전철로 출퇴근하면서
가파른 계단을 뛰어서 오르내리며
가쁜 숨을 쉬는 이유를,
그리고 체중을 조절하고 있는 이유를
아내는 모를 것이다.
내가 나름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축구화도 남아 있겠다,
코로나 시대가 지나고 나면
한 번쯤은 축구장에 가서
이슬 반짝이는 잔디 위에서
숨이 멎도록 달려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고 나서 축구를 그만두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오늘 아침 전철을 타고 출근할 예정이다.
전철을 갈아타기 위해 오르는
18 계단이 네 개가 있는
45 도 경사의 도합 72 계단을 헉헉거리며 뛰어 오를 것이다.
전철이 기다리는 동안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부지런을 떨 것이고
퇴근하면서 우리 집이 있는 7 층까지
걸어 오르기를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말 없는 반란은
마지막 축구를 하는 그 날까지 그치지 않을 것이다.
(다음은 축구장에서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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