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성탄시기가 되면 바깥 날씨는 꽁꽁 얼어붙을지 몰라도 우리 식구들의 마음의 온도계는 늘 영상을 가리킵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멀리 있는 대학을 가고,
그러다 보니 가족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날이 한 해 중 며칠이 되질 않습니다.
그러기에 멀리 떠난 식구들이 다 함께 모여 식사하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연말의 성탄 시기는
우리 식구 모두에게 설레임과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은 우리 식구들의 연말 축제의 서막입니다.
우리 식구는 말 그대로 우리 부부와 아이들뿐 아니라 같은 동네에 사는 아내의 형제들과 아이들,
그리고 내 동생 가족을 모두 뭉뚱거려 쓰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내가 모두 다섯 형제이니 배우자와 아이들이 모두 모이면
멀리 떨어져 사시는 부모님을 빼고도 우리 식구는 서른 명이 넘습니다.
추수감사절 저녁식사가 끝나면 우리 식구 모두 흥분과 설레임으로 들뜨기 시작합니다.
바로 ‘땅콩친구’를 뽑는 순서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땅콩친구’는 아내가 결혼하기 전부터 자기의 식구들과 하던 성탄시기의 전통인데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땅콩 껍질 안에는 대개 두 개의 땅콩이 나란히, 그리고 사이좋게 들어 있기에
그런 비밀스런 사랑의 관계를 뜻하는 ‘땅콩 친구’라는 이름이 붙은 것 같습니다.
독일 분에게 배운 것이라고 하는데 식구들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제비 뽑으면
그 사람이 자기의 ‘땅콩 친구’가 되고 그 ‘땅콩 친구’를 위해서
그 순간부터 드러나지 않게 기도와 선행을 하는 비밀 작전(?)이 개시됩니다.
서로의 땅콩 친구는 철저히 비밀에 부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데,
호기심으로 충만한 꼬맹이들 사이에서는 누가 누구의 땅콩 친구인지를 알아내기 위한
첩보전(?)이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꼬맹이들뿐만 아니라 대학을 졸업한 조카들 사이에서도
땅콩친구의 계보를 파악하려는 치열하고도 지능적인 작전이 시작됩니다.
나이 어린 동생들을 땅콩이 들어간 초콜릿 같은 것으로 매수를 하는 저차원적인 방법이 동원되기도 하고,
고차원적이고 지능적인 심리전을 쓰기도 합니다.
지난 해에 조카 세연이와 이야기를 하던 중, 세연이가 내 땅콩친구가 누구냐고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불쑥 질문을 하였는데 얼마나 자연스럽고 천연덕스러운지
그만 내 입에서 땅콩친구의 이름이 발설될 뻔한 위기를 겪은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땅콩친구의 계보 파악을 했다고 하더라도
크리스마스 파티 전에 땅콩 친구 계보의 전모가 밝혀진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크리스마스 파티 때 땅콩친구가 하나 둘 씩 밝혀질 때마다 흥분은 조금씩 절정을 향해 치닫습니다.
모든 식구는 자기의 땅콩 친구를 위한 선물을 하나씩 마련하고 파
티 때 자기의 땅콩 친구를 공개하면서 카드와 함께 선물을 전달합니다.
땅콩 친구의 선물만 준비하면 되니 그 많은 형제와 조카들의 선물을 일일이 준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 한 명만의 선물만 준비하고, 단 한 명의 땅콩 친구로부터만 선물을 받지만
그 효과는 모두에게 선물을 하고 모두에게 선물을 받는 효과가 있습니다.
다른 이가 선물을 받아도 내가 받는 것처럼 기쁘고 흥분합니다.
그리고 그 동안 땅콩 친구를 위해 무엇을 했는 지도 함께 나눕니다.
우리 둘째 딸이 어렸을 적에 막내 처남이 둘째의 땅콩 친구인 적이 있었는데
가끔씩 딸 아이가 흥미를 가질 만한 기사를 잡지나 책에서 스크랩을 해서 캔디와 함께
우리 집 우체통에 넣어 놓곤 했습니다.
그것을 발견한 딸아이는 무척이나 흥분해서 자기의 땅콩친구가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했지만
그런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딸아이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글씨도 왼손으로 쓰고
아이가 잠든 밤에 내용물을 우체통에 넣는 등 주도면밀하게 작전을 수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남자 조카 중에는 땅콩 친구인 아빠를 위해 아빠가 출근하기 전
몰래 아빠의 구두를 따뜻하게 해서 신발장에 넣어 둔 아이도 있습니다.
작년 나의 ‘땅콩 친구’는 막내 아들 민기였습니다.
운전을 해서 10시간이 넘는 거리에, 그것도 군대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민기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2월 초에는 좀 무리를 해서 아내와 함께 민기가 있는 곳으로 면회를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전에 어렵사리 민기와 전화 통화를 하고 사랑한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민기가 생각날 때면 화살기도도 바쳤습니다.
이렇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각기 달라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는
우리 식구들의 크리스 마스 파티는 서로를 사랑하고,
또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느끼고 확인하는 행사입니다.
마치 전깃줄을 통해서 전류가 흐르듯, 예수님의 탄생으로 비롯된 사랑이
식구들 사이를 흐르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어서 식구 모두가 행복해집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땅콩 친구’로 뽑았습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은 나와 우리 식구 뿐 아니라 전 인류를 당신의 ‘땅콩 친구’로 뽑아
사랑을 나누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게 태어나시는 아기 예수와 함께,
눈에 보이는 식구들 중 하나를 ‘땅콩 친구’로 삼아 사랑을 나누는 우리 식구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 – 이 세 분이 이루셨던 성 가정에서도 ‘땅콩 친구’ 뽑기를 하셨던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