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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길목에서

봄이 오는 길목에서

 

 

'춘래 불사춘' (春來不似春) -봄이 왔어도 봄 같지 않다.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옛 사람들의 뛰어난 예지에 대해

감탄을 하곤 한다.

그 감탄은 한 번에 그치는 게 아니라 봄을 맞고 보내는

게절의 길목 언저리에 있을 때면

빼 놓지 않고 늘 무릎까지 치며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정도이다.

 

사실 봄이 딱히 언제 시작된다고 말하기는 무척 어렵다.

미국에서는 공식적으로 봅이 시작되는 날이 있어서

달력에도 표시가 되어 있는데

솔직히 말해서 내가 무지한 까닭인지 봄이 시작되는 기준을 모른다.

3월 중순이 지났어도 지난 토요일에 눈이 내리더니

어제는 오후부터 내린 눈 때문에

퇴근 길에는 거의 기다시피 해서 집에 올 수 있었다.

한 겨울처럼 눈이 3-4인치나 내려

발등을 덮을 정도로 쌓이기는 했어도

공식적으로 봄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달력은 말을 하고 있으니

지금이 겨울인지 봄인지,

계절의 경계를 가르는 일은 영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옛 말은

양원히 명언으로 남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렇게 모호한 봄의 경계를 아는 나만의 방법이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snow drop이라는 작은 꽃을 통해서이다.

아직 땅이 얼어 있을 2월 중순을 갓 넘기면

우리집 현관 화단 가장자리에

다른 어떤 봄꽃나무 보다도

서둘러 snow drop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바로 그 무렵이 나의 봄이 시작된 때인 것이다.

 

모든 꽃들이 다 아름답긴 하지만

난 유난히 이 snow drop을 사랑한다.

그 꽃과 눈 한 번 맞추려

아직 언 땅에 엎드리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이니 말이다.

우리집 뜰에 피어나는 수십 가지 크고 작은 꽃나무들 중에

유독 이 Snow drop에 마음이 기우는 건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사춘기 남자 아이들의 코밑에 거뭇거뭇 나오기 시작하는 수염처럼

언 땅을 뚫고 몇 군데 무리를 지어

파릇파릇 고개를 내미는 녀석들을 보면서

난 봄이 왔음을 직감적으로 알게 된다.

이른 새벽 집 문을 나설 때, 

아직 뺨에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봄의 향기가 묻어오는 것도 그 때 쯤이다.

 

snow drop은 워낙 키가 작아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그냥 스치기가 쉬운 그런 꽃이다.

초록의 가지에 흰 꽃이 처음엔 종처럼 매달려 있다가

꽃이 벌어지면 그 흰 꽃잎에 초록의 하트 모양의 무늬를 드러내는데

나는 그 꽃을

하느님이 보내주시는 .

'사랑과 희망의 전령'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처음엔 작은 종모양을 하고 있다가 그 꽃이 다 피어 벌어지면

눈을 닮은 흰 꽃에 연초록의 하트 무늬가 나타나는데

얼마나 신기하고 또 신비로운지 모른다.

 

지난 일요일엔 아직 언 잔디가 채 녹지도 않았는데

가만히 땅에 엎드려 

한참을 snow drop을 들여다 보았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자기들끼리 이야기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하얀 종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아직은 다 벌어지지 않아서 하트 모양의 무늬를

온전히 볼 수 없어도

슬쩍 드러난 초록빛과 함께 흰 빛이 내 가슴으로 조용히 스며들어왔다.

아, 비로소 내 가슴 속에도 봄이 온 것 같았다.

겨우내 어두웠던 방의 커튼을 걷은 것 처럼

어두웠던 내 마음이 밝아지는 것 같았다.

 

snow drop의 키는 내 손으로 반 뼘이나 될까,

참 작은 꽃나무이다,

그러니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그냥 그렇고 그런 '꽃이 피었나'하고 무심히 지나치기 쉽다.

그러니 그 꽃과 만나려면

찬 땅에 넙죽 엎드려야 한다.

하느님의사랑과 희망은

아주 낮은 곳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작정한 것처럼

더 이상 키가 자라질 않는다.

 

'사랑과 희망의 하트 무늬'는

이렇게 대지와 가장 가깝게 눈과 몸을 낮춘 사람들에게만 보인다.

춥고 어두운 불모의 겨울이 다 할 즈음에

희망과 생명의 봄이 온다는 것을 알려주러

누구보다도 먼저 눈 속에서 피어나는 snow drop은

그야말로 하느님의 전령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음 주면 아직 다 벌어지지 않은

snow drop이 스스로 옷고름 풀고 제 속살을 다 보여줄 것이다.

그러면 하얀 꽃 잎 위의 하트 모양을

뚜렷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모습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이렇게 가슴이 뛰고 흥분이 되는 걸 보니

어제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고 쌓여 있어도

 

봄은 봄인가 보다.

 

 

 

 

 

 

아직은 다 벌어지지 않은 는 같이 순결한 꽃잎.

 

누군가를 안다는 것,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마주 볼 수 있도록

눈과 마음을 맞추는 일이 아닐런지.

 

 

 

 

 

뒷 뜰의 나뭇가지에도

붉은 나무꽃이 여드름처럼 돋았다.

머지 않아 이 나무 저 나무에서

나무꽃 터지는 소리가 들릴 것 같다.

붉으스름한 색과

초록색의 나무꽃이 어루어지는 때가 오면

우리 마을은은 파스텔 그림이 된다.

 

 

 

 

 

 

 

 

 

짐 안의 식물들도 봄을 맞을 차비를 한다.

창가에 자리한 다육이들은

어느새

발그름하게 수줍음을 탄다.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