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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드님

1.

막내아들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며칠 집에 다니러 왔다.

해병대 Senior DI(Drill Instructor)의 임무를 시작하기 전

잠시 짬을 낸 것이다.

 

큰 아들은 동생을 환영하기 위해

집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테니스 코트로 초대를 했다.

 

둘이 함께 할 수 있는 테니스를 치는 것으로

동생을 환영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사실 큰아들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학교 대표팀에 들어갈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다.

막내아들은 테니스를 비롯해 모든 운동을 잘했지만

음악을 하는 바람에 학교 스포츠 대표팀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음악 때문에 실제로 자기가 좋아하는 스포츠 활동을 포기해야만 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병대에 입대해서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막내아들은 군대에서 다른 운동을 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했지만

남는 시간에 근육 운동을 했다.

막내아들의 어깨는 내 두 손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다.

대충 캔털로프(Canrtalope) 멜론보다 큰

허니듀(Honey Dew) 멜론의 크기의 어깨를 막내는 가지고 있었다.

처음 군대에 갈 때만 해도 막내아들은 키는 나보다 컸지만

체형은 나와 비슷해서 

지금과 같은 우람한 근육을 보면

상전이 벽해가 된 것 같이 경이롭다.

 

내가 1 년 넘게 근육운동을 해 본 경험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막내아들은 오랜 시간 동안

자신과 싸우며 현재의 몸 상태를 만든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흘린 땀과 고통의 신음, 

그리고 자신의 성장을 위해 쏟았던

모든 시간에 대해 존경의 마음이 들었다.

근육의 성장뿐 아니라 분명 내면의 성장도 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2.

큰아들은 작년에 직장을 옮겼다,

아주 큰 로펌에서 규모가 작은 곳으로.

먼저 다니던 직장에서 아주 뛰어난 근무평점을 받고

몇 해 뒤에는 고급 맨션 한 채에 해당하는 연봉을 제공한다는

회사의 유혹을 물리치고

지금의 로펌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직장을 옮길 결심을 한 것은

업무가 너무 과중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도 지나치다 싶었다.

가족끼리 모임이 있을 때도 끊임없이 일을 했다.

코로나 발발 이전에는 새벽 다섯 시에 퇴근할 때도 있었다.

 

큰아들은 근본적으로 관계를 중시하는 성정을 가지고 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Law School 1년 차 때

친구가 NBC TV의 'Saturday Night Live'라는 

유명 프로그램에 고정 코미디언으로 첫 출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먼 거리를 달려와 축하를 할 정도이다.

Law School 첫 해의 성적은 로펌을 선택한 사람들에게는

법률가로서의 장래를 결정한다고 한다.

 

결국 큰아들은 아주 좋은 로펌에서 일할 기회를 갖게 되었고

지금은 자기가 선택해서 직장을 선택할 수 있는 실력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가 좋아하는 운동도 하고

친구들과 만나서 아름다운 시간도 함께 나눌 수 있는'직장을 갖게 되었다.

 

동생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코트를 예약하고

동생과 테니스를 함께 칠 수 있는 시간을 나누어 갖는

여유를 갖게 된 큰 아들에게도 존경의 마음이 들었다.

 

어마어마한 부를 얻을 수 있는 유혹을 물리치고

(그런 오퍼를 받았을 때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고 한다.)

삶의 여유와 행복을 선택한 아들,

그런 마음 가짐이 이 아빠의 마음을 흐뭇하게 한다.

 

3.

삶은 선택의 연속이고

그 선택의 결과는 실존이다.

실존은 판단의 영역이 아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며 인생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우리 두 아들은 자신이 선택한 삶을

아주 성실하고 꾸준하게 살아가는 것 같다.

 

두 아들이 테니스 치는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의 결정을 살아내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내 삶의 진로를 결정할 때

주저하며 쉽게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살아온 

나에 비해

두 아들은 

미래를 향한 선택을 힘 있게 결정하고 실천하는 힘을 가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나의 두 아들을

'아드님'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자식자랑을 하는 부모가 팔불출의 하나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과감하게 '아드님'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것도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담아서,

그리고 기꺼이 팔불출이 되려는 나의 선택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