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제주일기 - 거문오름

제주 일기 - 거문오름

제주에 도착하고

밤과 낮 구별 없이 지내고 있다.

시차도 시차이지만 세탁소 컴퓨터에 문제가 생겨서

한밤중에 미국과 연락하느라

어제에 이어 오늘 밤도 뒤척이고 있다.

 

은퇴를 했지만 아직도 등 뒤에서 일어나는 일과 사람들에

나 몰라라하고 내 갈 길만을 갈 수는 없는 일이다

당분간은 뒤통수가 내 의식에서 지워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전 인생을 등 뒤에 두고 출가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겠다.

그렇게 인연의 끈을 끊어버리고 갈 길 가는 것은

과연 대승적 결정인가, 아니면 도피인가.

 

이번 일로 나는 결코 니르바나에 이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더 깊어졌다.

늘 번뇌를 안고 살아가는 게 내 팔자인 듯싶다.

많이 놓았다고, 놓는다고는 해도

업의 굴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거의 밤을 번뇌로 지새우다가

새벽에 잠시 눈을 붙였는데

어지러운 꿈이 머릿속을

궤도 없이 비행을 하는 인공위성처럼 어지러이 떠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부스스한 정신으로 눈을 뜨고 보니

환한 햇살이 커튼 사이로 밀려들고 있었다.

창문을 여니 신선한 바람이 햇살에 묻어

호텔 방 안을 채웠다.

 

이윽고 머리가 샘물처럼 맑아졌다.

 

창문을 여는 일은

일상의 삶에 꼭 필요한 일이다.

내 육신과 영혼을 위해서도.

 

거문오름까지는 택시로 이동을 했다.

우리는 열 한 시에 예약이 돼 있었다.

벌써 오래전에 아내의 친구가 우리를 위해 예약을 해 두어서

아무런 문제 없이 입장료를 내고 11시까지 기다렸다.

안내하시는 분의 주의 사항을 듣고

우리 그룹은 오디세이를 시작했다.

 

거문오름은 세 가지 코스로 되어 있는데

하나나 둘, 아니면 세 코스를 다 선택할 수도 있다고 한다.

처음 두 코스는 안내인의 설명과 통제를 따라야 하나

세 번째 코스는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두 번째 코스까지 마친 우리 그룹의 사람들은

모두 탐방을 마치고 돌아갔지만

우리 부부는 세 번 때 코스를

오붓하게 둘이서만 누리어 가질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백수가 가진 특권은 시간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천천히 시간에 쫓기지 않고

시간과 함께 발맞추어 갈 수 있는다는 것은

'노동의 원죄'에서 벗어난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라고 할 수 있다.

 

거문오름의 이름을 있게 한 것은

아무래도 오름의 첫머리를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삼나무 숲일 것이다.

 

울창하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것이리라.

날씬하게 위로 뻗은 나무는

고개를 뒤로 젖혀야 나무의 꼭대기에 시선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키가 늘씬했다.

 

어둔 나무숲 사이로

반갑게 들어오는 햇살.

 

내가 거문오름을 기억할 때 떠오르는 대표 이미지가 

바로 어둠 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빛이 될 것이다.

(사진도 여러 장 찍었다.)

숲길에 들어서니 몸이 서늘해졌다.

몸만 서늘해지는 것이 아니라

잠자는 영혼의 세포가 하나하나 눈뜨고 기지개를 켜는 느낌이 들었다.

 

거문오름은 영혼이 맑아지는 곳이다.

 

길안내와 설명을 하시는 분은 

성실하고 진지하게 거문오름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거문오름이 유네스코 세계 자연 유산 보호지역으로 선정된 이유며

화산 폭발과 마그마의 이동,

현무암과 현무암 사이에 생긴 굴과 공간들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리고 같은 장소에서 4계절이 공존할 수 있는 이유 등을 차분하게 설명해주었다.

제주의 자연에 대한 깊은 사랑이 설명 중에 간간이 배어 나왔다.

내가 만난 제주의 택시기사들, 그리고 탐방 안내인은

제주를 사랑하는 것을 넘어 추앙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어차피 나는 지질학이나 생물학과는 거리가 멀고

흥미도 별로 없다.

과학에 대한 이해력이 현저히 부족하기 때문이다.

 

단지 숲길 어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

동백나무 옆에서 안내인이 했던 이야기가 뚜렷하게 남아 있다.

 

일찍 꽃이 떨어지는 동백나무를

집 안에 들이지 않는다는 제주 사람들.

 

동백꽃에 투사된 제주 사람들의 한과 슬픔이

안내원의 설명을 통해서 내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나는 내가 짐작할 수 없는

오래전에 형성된 지질학적, 생물학적인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간간이 보이는 빨간 단풍과

어둔 숲에 생명의 존재를 알려주는 새소리에

내 눈과 귀를 열었다.

 

어둠에 스며드는 빛.

어둠 속에서도 빛이 있음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거문오름 탐방길을 마치고 숲을 빠져나오니

피곤에 쩐 내 몸과 영혼이

냉수마찰을 한 것처럼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내 삶 속에도

거문오름 같은 곳 하나 쯤 있으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