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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백수(白手)일기 - 큰 아들과 테니스

백수(白手)일기 - 큰 아들과 테니스

백수 1일 차는 허전함이라든지

아니면 심각한 존재 이유를 생각할 여유 없이

부드럽게 맞았고 유연하게 보낼 수 있었다.

 

은퇴 전에 우리 아이들에게 

은퇴한 뒤 무엇을 할 거냐는 아주 캐주얼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주말에 장거리 달리기를 하는

둘째 지영이와 함께 뛰기도 하고,

대학원 심리학 교수로 있는 학교에 불쑥 찾아가

점심 식사를 같이 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셋째가 일하고 있는 공연장에도 가서

콘서트 관람도 할 것이고

손주들의 학교에서 학예회 같은 행사에도 갈 수 있을 것이다.

 

South Carolina에 있는 해병대 신병 훈련소(Boot Camp)에서

새로 근무를 시작한 막내아들을 보러

먼 길을 떠나길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큰 아들이 제안을 하나 했다.

가끔씩 자기와 테니스를 함께 하자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무슨 제안을 하면 

별 일이 없으면 무조건 예스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아들과 나 사이에 놓여 있는

허드슨 강만큼이나 넓고 깊은 실력 차이다.

큰 아들은 고등학교 신입생부터

학교 대표팀 선수로 발탁될 정도로  테니스를 잘 친다.

 

아들의 테니스를 치는 모습을 보면서 

그 우아하고 유려한 모습에

연모의 감정을 갖는다면 모두 내가 주책스럽다고 할 것이지만

나는 그런 감정을 도로 주워 담을 의사가 없다.

 

그런 아들이 며칠 전에 

나와 테니스를 치자고 초대를 한 것이다.

막내아들이 휴가를 나왔을 때 나와 두 아들이

테니스를 친 것도 벌써 5 년은 지난 것 같다.

잘 치지도 못하는 테니스를 함께 치자고 한 것은

아빠에 대한 배려일 것이다.

테니스를 빌어 큰 아들을 사적으로 알현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사려 깊음을 읽을 수 있었다.

황송한 마음으로 프로스펙트 공원에 있는 실내 테니스장으로 출발을 했다.

 

아들에 대한 불경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30 분 거리에 있는 목적지를 향해

한 시간 전에 출발을 했다.

그런데 월요일 아침 맨해튼 방향의 길이란 길은

모두 빨간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평소보다 거의 세  배의 시간을 들여

테니스 코트에 도착해보니

아침 8 시부터 9 시까지 예약된 시간의 3분지 1은 이미 까먹은 상태였다.

몸을 풀 사이도 없이 아들이 건네주는 테니스 라켓을 잡았다.

기분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런데 여러 종류의 어려움이

아들이 네트를 넘겨 내 쪽으로 치는 공에 딸려왔다.

그리고 달리기 용도의 운동화가 너무 헐렁해서

자꾸 벗겨지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운동화는 장애도 아니었다.

안경을 끼지 않으면 공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반응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테니스 코트의 바닥은 클레이로 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아스팔트 코트 밖에 경험하지 못한 나에게

클레이 코트는 새로운 세계일 수밖에 없었다.

아들의 스트로크는 탑 스핀이 걸려서

내 쪽 코트에 떨어지는데

아스팔트와 달리 클레이 바닥 위에서는

예상치를 훨씬 넘는 속도와 각도로 튀어 올랐다.

게다가 바닥이 고르지 않으니 공이 옆으로 튀기도 했다.

 

어려움을 겪으며 조금씩 코트에 적응을 했다.

어쩌다 랠리가 대 여섯 번 이어지면

아들은 강한 스매싱으로 공을 내 코트 구석으로 보냈다.

그럴 때는 내 몸은 미처 반응도 못하고

눈으로만 멀뚱멀뚱 공이 떨어지는 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아들이 그렇게 강한 스매싱을 하는 것은

아빠의 기를 꺾기 위함이 아니라고 믿고 싶다.

사실 대 여섯 번의 랠리가 이어지면

어김없이 호흡이 가빠지고 다리도 굳어지니

흐름을 끊음으로 해서

아빠에게 휴식을 주기 위한 아들의 깊은 배려라고 믿고 싶다.

그렇게 효자 아들은 우상이 되어 내 속에 자라게 되는 것이다.

 

나는 40 분 동안 세 번을 쉬었다.

 

한 달 동안 쉬었던 운동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간절함을 아들과 함께 한 테니스를 통해 얻을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건강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라고 아들은 말없는 응원을 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사랑에 눈먼 사람에게 흔히 나타나는 증세)

 

테니스를 마치고

나는 아들에게 은근히 추파를 던졌다.

시간이 괜찮으면 아들과 아침 식사를 같이하며

더 많은 시간을 나누어 갖고 싶어서였다.

 

"몇 시부터 일 시작하니?"

"아홉 시 반."

 

아들이 일을 시작하기까지 30 분이 채 남지 않았다.

 

집에서 일을 하지만 

일을 시작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고

일정한 절차를 거쳐서 일과를 시작한다는 거였다.

 

나의 소박한 희망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어서 가라고 아들의 등을 떠밀었다.

아들에게는 해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었고

 

나에겐 ----

 

딱히 해야 할 일이  없었다.

 

무언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내 손을 보았다.

어쩐지 내 손이 하얗게 변한 것 같았다.

 

아, 그렇지, 나는 오늘부터 백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