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일요일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섰다. Maine주로 향해 방향을 잡아서 말이다. 며칠 전부터 어디 훌쩍 다녀오자고 하는 말을 귓전으로 흘려 보냈다.
떠나는 설레임이나 기쁨 보다는 돌아온 후의 후유증부터 머리에 떠올리는 나는 그냥 모른척 하고 지나가기를 바랬다. 토요일은 그냥 무심히 지나갔다.
일요일 아침, 축구 하고 돌아올 때까지도 이러한 나의 의도가 성공한 듯햇다. 그런데 아내가 자기 차 뒷좌석 등받이를 접고는 그 위에 내 서재에 있는 소파 베드의 매트레스를 까는 것이 아닌가. 이불과 슬리핑 백까지도 실었다.
그러더니 차에 타라는 것이었다. 한국에 한동안 '야타족'이라고 있었다고 하는데 내가 그 꼴이 된 것 같았다. 다만 내가 운전대를 잡은 것이 한국의 상황과 다르다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어쩌랴? 납치당한 자가 살 길은 납치자에게 고분고분 협조하는 길밖엔
다른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머릿속에 떠 올렸다. 그래서 잠시 빌미를 얻어 카메라도 챙기고
혹시목적지가 추울지도 모르니 긴 옷 하나 챙기는 것으로 준비 끝.
하염없이 북으로 북으로 달리다 보니 늦은 오후,
해가 뉘엿뉘엿 스러지는 기색이 보일 때 눈에 보인 곳이 York Beach였다.
우리는 급히 Exit으로 빠져나왔다.
어차피 잘 곳을 정해 놓지 않은 상태이니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여유를 부린 것이었다. 시골길을 한 십여 분 달려 가니 유원지의 분위기가 물씬 나는 상가지역이 나왔다. 바닷가에서 철수한 사람들이 몰려 다니고 있었다. 음식점, 영화관, 그리고 게임을 할 수 있는 곳등이 사람들로 북적이고 잇었다.
우린 무작정 바닷가로 향했다.
해변을 산책하는 부부와 개 벌써 여름을 보내는 쓸쓸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왼쪽엔 별장처럼 제법 규모가 큰 Summer House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한 쪽은 서민적인, 너무나 서민적인 민박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리고 가운데 쯤, 우리 차와 우아한 자태의 '납치부인'이 바닷가를 향해 서 있다.. 남편을 사랑하고 그리워 하는 그래서 언제나 나를 납치해서 자기 곁에 두려는 .납치부인'
나비부인처럼 '어떤 개인 날'이라는 아리아를 속으로 둥얼거리고 있는 지도-----
먹이를 찾는 갈매기.
밤이 오면 저 새는 어디에 머물까.
우리처럼 오늘밤 머물 곳을 정하지 않았을까?
여름의 끝머리를 즐기는 어느 가족.
바닷가에서 해수욕은 아니 하고 모포를 두르고 있는 것이 우스꽝스레 보인다.
여름과 가을의 갈림을 이곳에서 볼 수 있었다.
아니 여름과 가을의 만남이라고 해야 할까.
해가 넘어가며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었나보다. 윈드 서핑을 즐기고 돌아가는 젊은이들.
싱싱한 젊음들.
삶을 끝내고 저 세상으로 돌아갈 때
나도 싱싱하면 좋겠다.
내도 이젠 저 사람들을 '젊은이'라고 부르는 나이가 되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 갑자기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정신 없이 놀다 보면 어느덧 밤이 가까이 오곤 했다.
여기 저기서 '아무개야, 밥먹어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너 살, 혹은 너덧 살 쯤이었었을 것이다.
황량했던 느낌만이 내 기억의 한 귀퉁이에 남아 있는 곳.
50년 전의 수색이라는 동네에도 노을이 아름답게 졌을까?
그런데 풍광의 기억은 말끔히 지워지고
소리의 기억만 남아 있다.
노을이 깔리면 '아무개야, 밤 벅어라'하고 외치며
아이들을 집으로 불러들이던
이웃집 아이들 엄마의 목소리가 야속하게 들리곤 했었지.
늘 낮이 짧아서 아쉬웠던 수색의 저녁 시간.
더 놀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등 뒤엔 어둠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학선아 밥먹어라" 하고 부르시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50년을 떠돌다 오늘 내 귓전에 바람처럼 스친다.
해 저무는 저녁, 바닷가에 남겨진 발자국. 우리의 삶도 저 발자국 같은 것이 아닐까? 밤 사이 밀물에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는 발자국 같은 것. 그래도 낮 시간 동안의 즐거웠던 기억은 남으리라. 무엇을 꼭 남길 필요도 없이 시간을 아름답게 채색하며 사는 일.
바닷가엔 모래성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빠와 아들이 같이 한 삶의 한 페이지. 저 아이의 기억 속에 오늘 하루가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새삼 같이 사는 가족들의 소중함, 사랑 이런 느낌들이 가슴 속에서 스멀거렸다.
Maine주로 향해 방향을 잡아서 말이다.
며칠 전부터 어디 훌쩍 다녀오자고 하는 말을
귓전으로 흘려 보냈다.
떠나는 설레임이나 기쁨 보다는 돌아온 후의 후유증부터
머리에 떠올리는 나는 그냥 모른척 하고 지나가기를 바랬다.
토요일은 그냥 무심히 지나갔다.
일요일 아침, 축구 하고 돌아올 때까지도
이러한 나의 의도가 성공한 듯햇다.
그런데 아내가 자기 차 뒷좌석 등받이를
접고는 그 위에 내 서재에 있는
소파 베드의 매트레스를 까는 것이 아닌가.
이불과 슬리핑 백까지도 실었다.
한국에 한동안 '야타족'이라고 있었다고 하는데
내가 그 꼴이 된 것 같았다.
다만 내가 운전대를 잡은 것이 한국의 상황과 다르다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어쩌랴?
납치당한 자가 살 길은 납치자에게 고분고분 협조하는 길밖엔
다른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머릿속에 떠 올렸다.
그래서 잠시 빌미를 얻어 카메라도 챙기고
혹시목적지가 추울지도 모르니
긴 옷 하나 챙기는 것으로 준비 끝.
하염없이 북으로 북으로 달리다 보니 늦은 오후,
눈에 보인 곳이 York Beach였다.
우리는 급히 Exit으로 빠져나왔다.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여유를 부린 것이었다.
시골길을 한 십여 분 달려 가니
유원지의 분위기가 물씬 나는 상가지역이 나왔다.
바닷가에서 철수한 사람들이 몰려 다니고 있었다.
음식점, 영화관, 그리고 게임을 할 수 있는 곳등이
사람들로 북적이고 잇었다.
우린 무작정 바닷가로 향했다.
벌써 여름을 보내는 쓸쓸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다른 한 쪽은 서민적인, 너무나 서민적인 민박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남편을 사랑하고 그리워 하는
그래서 언제나 나를 납치해서 자기 곁에 두려는 .납치부인'
나비부인처럼 '어떤 개인 날'이라는 아리아를 속으로 둥얼거리고 있는 지도-----
밤이 오면 저 새는 어디에 머물까.
우리처럼 오늘밤 머물 곳을 정하지 않았을까?
바닷가에서 해수욕은 아니 하고 모포를 두르고 있는 것이 우스꽝스레 보인다.
여름과 가을의 갈림을 이곳에서 볼 수 있었다.
아니 여름과 가을의 만남이라고 해야 할까.
해가 넘어가며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었나보다.
윈드 서핑을 즐기고 돌아가는 젊은이들.
싱싱한 젊음들.
삶을 끝내고 저 세상으로 돌아갈 때
나도 싱싱하면 좋겠다.
내도 이젠 저 사람들을 '젊은이'라고 부르는 나이가 되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
갑자기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정신 없이 놀다 보면
어느덧 밤이 가까이 오곤 했다.
여기 저기서 '아무개야, 밥먹어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너 살, 혹은 너덧 살 쯤이었었을 것이다.
황량했던 느낌만이 내 기억의 한 귀퉁이에 남아 있는 곳.
50년 전의 수색이라는 동네에도 노을이 아름답게 졌을까?
그런데 풍광의 기억은 말끔히 지워지고
소리의 기억만 남아 있다.
노을이 깔리면 '아무개야, 밤 벅어라'하고 외치며
아이들을 집으로 불러들이던
이웃집 아이들 엄마의 목소리가 야속하게 들리곤 했었지.
늘 낮이 짧아서 아쉬웠던 수색의 저녁 시간.
더 놀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등 뒤엔 어둠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학선아 밥먹어라" 하고 부르시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50년을 떠돌다 오늘 내 귓전에 바람처럼 스친다.
해 저무는 저녁, 바닷가에 남겨진 발자국.
우리의 삶도 저 발자국 같은 것이 아닐까?
밤 사이 밀물에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는 발자국 같은 것.
그래도 낮 시간 동안의 즐거웠던 기억은 남으리라.
무엇을 꼭 남길 필요도 없이 시간을
아름답게 채색하며 사는 일.
바닷가엔 모래성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빠와 아들이 같이 한 삶의 한 페이지.
저 아이의 기억 속에 오늘 하루가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새삼 같이 사는 가족들의 소중함, 사랑 이런 느낌들이
가슴 속에서 스멀거렸다.
같이 살아가는-------
해가 저 쪽 끝으로 넘어갔다..
아직도 갈 길이 먼 까닭인지 초조해진다.
떠나야 하느데, 날이 어두워지고 있다.
갈 곳이 없이 떠도는 영혼이 외로워지는 해질 녁.
그래도 막연하나마 우린 갈 곳이 있었다.
갈 곳이 있다는 것은 희망이 있다는 말과도 같다.
'The Road'에서 폐허의 땅을
걸어가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침내 다다른 바다.
거기서 만나게 되는 여자 아이.
희망이,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 시작되는 곳이 바다였다는 사실.
갈 곳이 있다는 희망으로 어두워도 떠나는 일,
희망 하나 붙들고 어둠 속을 뚫고 가는 일.
그것이 사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