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늦은 가을 저녁이었지요.
주일 미사가 끝나고 거의 모든 신자들이 돌아간 후
사제관으로 향하는 신부님의 뒷모습이
제 기억 속에서 지워지질 않습니다.
사제관 앞에 켜진 외등에
그림자만 길게 남기고
사제관의 문을 열고 들어설 때의
신부님의 마음이 어떨까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따뜻하게 맞아주는 가족도 없이
어두운 사제관에 들어설 때
인간적인 외로움이 왜 없겠어요?
단지 모든 이를 위한
모든 것이 되려고
독신의 사제직을 가려고 결심한 신부님의 신념과,
또 가족은 곁에 없지만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같이 계신다는 확신이 없다면
한 시라도 견디기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그런 신부님께
보이지 않게
위로와 힘이 되어드리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심은 이런 저런 핑계로
잘 지키질 못하고 살아가게 되네요.
작년인가 재작년 어느 겨울,
주일 아침에 눈이 굉장치도 않게 내린 적이 있었어요.
일어나 창밖을 보니 벌써 눈은
한 뼘도 더 넘게 쌓였는데,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고
눈발은 점점 더 기세등등하게 퍼붓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날 아침 미사에 큰 아들이 복사 담당이어서
미사 시간 한 시간도 더 전에
아들을 깨우며 부산을 떨었더니
아내는 오늘 같은 날은 빠져도
아무도 무어라고 할 사람 없다고 하면서
길을 막더군요.
길이 위험하니 나중에 가라고 만류하는 걸 뿌리치며
아들과 함께 눈삽을 차에 실고 성당으로 향했습니다.
성당 가는 길에 다른 차들은 거의 눈에 뜨이질 않더군요.
성당에 도착해보니
눈이 발목을 넘어
무릎 중간까지는 족히 쌓여 있었습니다.
눈삽으로 사제관에서 성당까지 길을 내었습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주님이 가시는 길을 내는 마음으로
눈 사이로 길을 내고
성당 주변도 다른 신자 분들이 다니실 수 있도록
길을 트고 나니 미사 시간이 거의 되었습니다.
그날 아침 미사엔
정말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의 신자들만
미사에 참석했지요.
그래도 그날 미사엔 제 아들이
신부님 곁에서 복사로 시중을 들었고,
신부님과 함께 참석한 모든 신자들이
서로서로 따스한 사랑의 체온을 나누는
은혜로운 체험을 했습니다.
비록 신자들이 적어도 서로서로 나눈 사랑은
성당 안을 곽 채우고도 남을 만큼 풍요로웠습니다.
밖에 쌓인 눈보다도 더 많이 쌓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