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어느 아침의 담쟁이 잎
담쟁이 / 안도현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을 나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 간다.
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토요일 아침.
출근길에 전철을 갈아타기 위해서
Broad Channel 역에 내렸다.
등 뒤의 역 담장 위로 해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건너편 담장 뒤 편에서 담장 안 쪽으로
담쟁이 잎들이 넘어온 것이 보였다.
그리고 눈을 내리니
그동안 어두워서 보지 못했던
플랫폼 아래로 철길이 보였다.
철로 아래쪽 침목 위를 기어
제법 긴 거리를 담쟁이 잎이 뻗어 있었다.
찬 바람이 가시지 않은
이른 봄부터
다시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지금까지
숨죽이며 기고 또 기어서,
여기에 이르렀을까?
그리 몇 계절을 용을 쓰느라
온몸이 빨갛게 달아오른 게지.
저리 처절한 붉은빛으로
온몸이 도화선이 되어 불타고 있는
담쟁이 잎들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아침.
11 월의 아침이 저리도 찬란할 수도 있음을-----
누군가는 11 월을
달력이 한 장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나의 달력은 아직도 한 장이나 남아 있는 것이다.
나의 삶도 여전히 찬란할 수 있다고
담쟁이는 여전히 빨갛게 기면서
나에게 속삭이고 있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