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향기 – 막내 민기 이야기
민기의 Juilliard Pre-college 졸업식에서 나, 민기, 바이얼리니스트 장영주 (Sarah), 아내
Sarah도 이 학교 출신으로 졸업식의 guest speaker로 초대 받았다.
“날라리” - 이 말은 막내 아들 민기를 남들에게 소개하거나 묘사할 때 내가 즐겨(?) 쓰던 단어입니다.
아빠가 되어가지고 아들을, 그것도 막내를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인격적으로 얼마나 함량이 모자라는 지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애들이 다 그렇지요, 뭐.”라든가, “우리 애도 그래요.”하는 맞장구를 기대하며,
미덥지 못한 자식을 둔 것이 비단 나만이 아니라는 사실 확인을 통해서
상대로부터 안심이나 위로를 이끌어내려는 나름의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비디오 게임이나 친구들과의 채팅, 그리고 어울려 노는 일에만 열중하는 민기는
내 눈에는 날라리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를 때면,
윗 아이들에게는 하지 않던 꾸중을 곁들인 따끔한 훈계를 하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곤 하였는데,
그 때마다 아내가 막고 나섰습니다.
“민기는 다른 아이들 하곤 다른 점이 참 많은 아이예요. 우리 더 기다려 봐요.”
하며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며 나를 설득하기에 아빠로서 아들에게 ‘본때’를 보여줄 기회를 놓지곤 했습니다.
사실 아내는 우리 아이들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특별한 면을 볼 줄 아는 직관력이 있어서,
나도 가끔씩 그 능력에 탄복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 막내의 경우에는 ‘아내가 잘못 짚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고
번번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서곤 했습니다.
그런데 날라리 민기가 11학년 때 New Jersey All State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선발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연주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민기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고 싶다는 희망을 밝혔습니다.
그 때 지휘를 하신 분이 미 해군의 군악대 지휘자였는데
며칠 간 합숙훈련을 하며 속된 말로 그 지휘자의 카리스마에 뿅 갔던 것 같습니다.
날라리 민기에게 꿈이 생겼다는 사실은 마치 민기가 벌써 마에스트로나 된 것처럼이나
아내와 내게 커다란 기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아내는 민기가 게임을 많이 해서 손놀림도 좋고 빠른데다가 운동도 많이 해서 다리도 튼튼하니
‘준비된 지휘자’라며 달뜬 속내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잘 생각해보니 날라리 민기가 다른 아이들과 다른 점이 영 없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마지 못해서이긴 해도 민기에게서 믿음의 불씨를 꺼버리지 않고 기다릴 수 있게 해 주었던
소소한 기억도 하나 둘 되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민기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였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에서는 졸업할 무렵에 전학년 학생들이 뮤지컬을 공연하는 것이 전통입니다.
전부 무대에 설 수는 없어도 백여명 남짓한 졸업생 거의 전원이 엑스트라라도
무대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일체감을 느끼는데 어른들이 보아도 그럴싸하게 잘 할 정도의 수준입니다.
민기는 주연을 뽑는 오디션에 참가했지만 탈락했고,
민기가 없어도 뮤지컬 전체 흐름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역을 맡게되었습니다.
주연이나 조연도 아니고 무대 뒷줄에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엑스트라 배역을 받아 공연을 하는 민기의 뮤지컬 구경은 결코 마음이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강당의 시설이 공연을 하기에 그리 좋질 않은지라 고개를 이리 빼고 저리 내밀어야
겨우 아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으니 짜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기대감이 전혀 담기지 않은 내 시야에 다른 출연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음에도
마치 신들린듯이 열정적인 연기를 하는 민기의 모습이 들어왔습니다.
춤은 물론 합창을 하는 부분에서도 눈까지 감아가며 열창을 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최선을 다 하는 민기의 모습은 이 아빠에겐 감동스럽기까지 하였습니다.
뮤지컬이 끝난 후, 민기의 모습을 본 다른 부모들로부터 칭찬을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모두 주연이여야 한다는 생각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민기는
그 날 주인공만으로는 뮤지컬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그 단순한 사실을 춤과 노래로 넌지시 일깨워 주었습니다.
들어나지 않아도 자기가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 하는 수많은 엑스트라들로 해서
뮤지컬이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로울 수 있는 지를 새삼스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날 밤 뮤지컬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차에서 내리니
텃밭 주위의 라일락의 향기가 뮤지컬의 합창처럼 어둠 속에서 달콤하게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비록 밤이라 꽃은 보이지 않아도 어둠 속에서도 라일락은 향기로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 민기가 음대로의 진학을 잠시 미루고 지난 7월에 미 해병대에 자원 입대했습니다.
물론 미 해병대 군악대의 연주요원이긴 하지만
훈련이 빡세기로 유명한 해병대 훈련소에서 석달간 피땀을 흘려야 하는 과정을 겪어야 하는데도, 그
힘든 길을 굳이 선택한 민기의 꿍꿍이 속(?)을 알 수 없어도 믿음으로 지켜보며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아름다운 향기로 세상의 한 구석을 채워주는 라일락 향기처럼,
민기 또한 어디에 있건 자신의 음악으로
세상의 한 모퉁이를 아름답게 꾸미리라는 그런 믿음으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