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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이야기

올 초에 썼던 옛 추억의 그림자를 쓰려다
옆 길로 샜던 글을 한 데 모았습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재모가 등장해서 주인공이 되는 그런 이야기
심심하고 시간 남아 도는 분만 읽어 주세요.

두서도 맥락도,

신뢰성은 더더욱 없는 글입니다.



기억을 짚으며()

 

1.

 

Prologue

 

언젠가부터 고등학교 카페에 들어와 글을 쓰면서

''라는 감옥 속에 갇혀 살았던 고등학교 시절의 나와

화해하고 싶었다.

그것은 나와의 화해이기도 하지만

같은 시간, 공간 안에서 함께 많은 것들을 나누어 가졌던

그대들과의 화해이기도 하다.

또한 떠나 보낸 시간과의 손잡음일 수도 있겠다.

오래 전부터 벼르고 있었던 일이기는 하나

살아가는 일의 빡빡함에서 자유롭지 못함은 나도 예외가 아니어서

미루고 미루어 왔는데

작년 신문기사를 보면서 대충 머릿속이 정리 되었고

이제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머리 속에 정리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생각나는 대로 자판이 가자는 대로 흐름을 따라갈 것이다.

글의 논리나 전개보다는

", 그런 일도 있었지." 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읽어주시기 바란다.

그리고 시간이 허락해야 하는 일이니

중간 중간에 쉬어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자연 흐름이고 뭐고 그런 것들은 무시하기로 한다.

그럼, 기억을 더듬어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오딧세이를 떠나 보자.

 

 

1.

작년 말이던가, 신문기사에서 F-4 전투기가 퇴역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실 보통 사람들에게는 팬텀(Phantom : 도깨비)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던

전투기의 퇴역이 그다지 뉴스가 만한 '꺼리' 없었겠지만

나에게는 특별한 아주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인연이 수도 있었을 법한 사람과 엇갈려

기억 속에서도 빛이 바래기에 충분한 세월, 35년이 지나고

느닷없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붙들었을 때의 마음이 이러할까-------

아무튼 맺어질 했던 인연으로부터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가야 같다.

 

1975, 그러니까 우리가 고등학교 마지막 해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많은 친구들이 오로지 대학이라는 목표를 향해 가고 있을 시기였다.

대학 가는 일이 운명을 거의 쥐었다 놨다 하는 시절이었으니

많은 친구들은 열심히 공부를 했고,

아니면 나처럼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알면서도

정작 공부보다는

온갖 공상을 하느라 시간을 보낸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떤 친구들처럼 책가방과 도시락은 꼬박 꼬박 챙기면서도

공부는 뒷전이고 연애 거는 일이나

'조직' 가담해서 조직적인 일에 심혈을 기울였던

친구들도 있었을 것이다.

 

실명을 거론해서 본인에게 미안한데

재모는 일찍부터 개화에 힘을 인물이다.

일학년 같은 반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문안으로 진출했다.

장안에서 보고 듣고 겪은 일을 다음

친구들에게 보고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재모는 소상하고 실감나게도 교실 안에서 장안의 일을 재현하곤 했다.

그러니 우리의 재모를

'친절한 재모씨'라고 부르는데 인색해서는 아니 것이다.

재모는 자신을 중심으로 둘러 앉은 친구들에게

때론 김두한 같이 악당을 물리치는 협객이기도 했고

여자를 꼬시는 건달이기도 했던

자신의 활약상을 소상하게 들려주곤 했다.

'친절한 금자씨' 감옥에서 만난 동료들에게

친절하게 대한 것은 자신의 복수를 위한 것이었지만

재모의 친절함은 친구들에게

영등포 구석에 처박혀 낙후된 의식구조에

바람을 일으키기 위한

순결한 친절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자기가 태어난 마을을 벗어나 보지 못한 조선시대의 시골사람처럼

동지사 따라 짐꾼으로나마 청나라를 다녀온

마을 사람 집에 모여 귀를 세우고

마디라도 놓질세라 정성을 다해 들었음을 재모는 기억하고 있을까?

 

재모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려는 순수한 열정은

그대로 지금의 모습에 녹아 있다.

그대들도 아시는 것처럼

재모는 홍콩으로 진출해서

새로운 세계를 견문하려는 사람들의

길라잡이를 하고 있다.

 

재모는 '작은 거인'이었다.

 

2.

 

팬텀기 이야기로 빨리 가야 텐데 뜬금없이

재모 이야기가 나오는 바람에 한참을 돌게 생겼다.

사실 이야기를 쓰고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

나도 감을 잃고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헤매고 있는 상태이긴 하지만

그냥 떠나 보기로 한다.

언젠가 마음 곳에 있으리라------

 

재모는 개화 사상에 불타 있어서 하루도 문안에 나가지 않고는 배겼다.

정도의 열정을 가진 인물을 우리 주위에서,

그리고 역사에서 다시 찾을 있을까?

흔히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라는 말을 한다.

흘러간 시간을 돌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우, 바로 재모의 경우에는

가정을 하지 않고 지나친다면

속이 쓰릴 같다.

너무나 아쉽고 허무한 역사의 가정!

가정을 하면서 속으로 울고 있다.

만약, 정말 '재모가 20세기가 아닌 19세기 중반에만 태어났더라면'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개화에 대한 열정으로 개화당에 가입해서

1894 갑신정변에 성공, 그리고 3 천하에 끝나지 않고

우리의 역사는 개화와 문명의 발전에 박차를 가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은 적어도 50년은 앞서 갔을 것임은

누구라도 짐작할 있는 일이다.

물론 그렇게 되었다면

재모는 중책을 맡아 혼신의 힘을 다해

민족을 위해 했을 것이고

역사학자들은 재모를 연구하느라 늦도록

등불을 밝혔으리라.

 

그런데 여기서 가지 짚고 넘어가야 것이 있다.

개화당을 이끈 인물들을 살펴보면

당대에 내노라고 하는 수재들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과연 재모가 개화파들 사이에 수가 있었을까?'하고

의문을 제기하지는 말기 바란다.

년도 지난 학적부를 대조하고

IQ 조사해서 청문회 따위를 하자고 하는

유치한 행동은 자제해 주기 바란다.

'작은 거인' 재모는 야구를 때에도

자기의 몸을 사리지 않는 열정을 보였으니까

집중적으로 면만을 보아주길 바란다.

야구의 포지션 중에 포수만큼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것도 없다.

그런데 재모는 포수를 했다.

살신성인!

남들이 꺼려하는 일을 열심히도 했다.

번은 빳따에 살짝 빗맞은 공에 눈자위가 터졌다.

 

(우리는 배트라고 하기보다는 '빳따'라고 발음했다.

지금도 영어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빴따'라고 하는데

미국 친구들이 갑자기 의아한 표정을 짓곤 한다.)

 

빨갛게 눈알이 뭉그러질 정도로 다쳤다.

이후 재모를 생각하면 다친 생각이 나서

마음이 아렸다.

얼마 재모에게 물어보았는데

눈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면 그렇지, 재모가 누군데, 하늘이 돌보시는 인물임을

다시 절감했다.

마치도 쌩떽쥐베리가 '지금 울고 있는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지 않으면

아이는 평생 기억 속에서 울고 있을 것이다'라고 것처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재모는 기억 속에서 핏줄 터진 눈을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괞찬다는 말을 듣고서야 나는 핏발 모습을

기억 속에서 떠나 보낼 있었다.

 

재모는 우리와 같은 시대에 태어 났다.

우리 민족을 위해서는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지만

재모 주위에 있던 우리에게는

분명 행운이었다.

안의 온갖 희귀한 소식을

재모를 통해서 접할 있었으니 말이다.

 

이런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불러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to be continued----

사족 : 내가 글을 시작했는 모르겠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너무 바쁘고 지쳐서

주일 아무 것도 쓰질 못하고는 공연히 스트레스 받고----

그러면서도

계속 써야되는 거야?

 

 

3.

 

기억을 짚어가는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가지 사과의 말씀을 드려야겠다.

이동희 동기가 답글을 남겼는데

답글에 대한 답글을 쓰다가 미숙한 실력 때문에

그만 지워지고 말았다.

용서를 바란다.

요지는 재모가 1학년 빳따를 어깨에 메고 다니다가

산업 선생님께 걸려서

빳따를 맞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산업화에 발목을 잡혀

개화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이러한 고증이 재모를 재평가하는

도움이 것이다.

새로운 방향에서 바라본 이동희 동기의 탁견이 놀랍고 신선했다.

게다가 산업이라는 과목이 있었다는 사실마저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나에게

기억의 한계며 부정확 함을 일깨워 주었다.

이동희 동기 같이 예리한 역사 의식을 가진 동기가 있다는 사실에

다시금 우리 조국 대한민국의 앞날이

영광스러울 것이라는 조심스런 기대를 갖게 한다.

 

그러나 재모, 우리의 재모가 누구인가?

'작은 거인' 아니던가.

 

길이 멀지만

야구 이야기가 나왔으니 재모의 야구 사랑에 관해서도

잠시 짚고 가야 겠다.

 

여기서 팬텀기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자꾸 옆으로 새느냐고

성화를 부리고, 짜증을 내는 사람이

혹시 있을 지도 모르겠다.

 

우리 어린 시절, 사람 많이 모이는

시장이나, 어는 공터에서 약장수들의 공연(?) 적이 있을 것이다.

''이며, 원숭이가 등장하고,

손으로 병이며 벽돌을 부수는 차력에

우리 마음은 얼마나 흥분했었는지.

그리고 간간히

'애들은 가라!'하는 소리에

흠칫 놀라 가는 하다 다시 돌아와

어른들 어깨 사이로 나사못 돌리듯

고개를 들이밀고

약장수들의 놀림에 자진해서 최면이 걸리곤 했었다.

주머니에 돈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돈만 있었다면 어른들께

식구 수대로 병씩 약을 사서 드리고 싶었었다.

아주 짧고 우발적이긴 하지만

어린 시절 그런 효심이 들었던 것도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아 맥없이 허물어지게 하던

약장수의 말솜씨 때문이었다.

이나 솜씨가 약장수들에 미칠 없는 것이

열등감으로 나를 괴롭히곤 한다.

언제고 그분들을 만날 기회가 된다면

무릎 꿇어 그분들의 제자가 되어

수련을 받고 싶다.

 

그리고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같은 청중 가운데는 바랍잡이들도 있었다.

'약효에 비해서 약값은 거저나 마찬가지'라거나,

'속는 치고 드시게 했더니

송장 같던 자기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걸었다'든가,

'결혼 한지 10년이 넘었어도 애가 없어서 시댁에서

쫓겨날 했던 딸아이가 먹고 임신을 했다' 등등의

바람잡이들의 추임새가 약파는 공터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으로 하나 되게 했다.

누구 하나 약효에 의심을 품는 사람은

그야말로 뭇매라도 맞을 기세가 지배적이었다.

 

말솜씨도 없고

바람잡이도 하나 없이

공터에서 약을 파는 오늘

비까지 내려 심란하다..

 

그래도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간다.

 

많이 길로 샜다.

그래도 내가 기특한 것은 옆으로 새도

자리로 오뚜기처럼 되돌아 오는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라는 점이다.

 

약장수가 초장부터

원숭이 묘기며 차력을 보여주지는 않는다는 점을

명심하자.

보여줄 하다가

약을 팔고는 보여줄 -------

이건 완전히 싸움이다.

원숭이의 묘기나 차력을 보기 위해서라도

약은 사야만 했었다.

나같이 돈은 없고 시간만 줄창  많은 아이들이나

약을 사고 싶어도 샀다.

그리고 없이 기다릴 아는 인내를 자리에서 배웠다.

약장수는 인생의 선생님이었다.

'고진감래'-고생을 진탕 하고 나면 감기가 찾아온다는

그런 사이비 말고 '인내는 쓰다, 그러나 열매는 달다.' 같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교훈을

실생활에서 가르쳐준 약장수에게

누가 돌을 던질 있을 것인가?

 

그러니 너무 조급하게 팬텀기 이야기를 기대하지도

조르지도 말기를 바란다.

아참 재모의 아구에 대한 열정을 이야기 하려다

길로 샜고

 

날도 샜다.

 

 

4.

 

 

지난 길로 샜다가

날마저 새버려

김마저 샜다.

다시 심기 일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을 떠나보기로 한다.

 

 

재모의 야구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이야기 하려다

약장수에  홀려 근처에 가보지도 못하고

서둘러 이야기를 마쳐야 했는데 오늘은

찾아갈 있을런지 모르겠다.

 

 

사실 처음에 글을 시작할 때는

두어 번으로 끝내려고 생각을 했는데

쓰다 보니 의지와 상관 없이 길어지게 되었다.

자꾸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연기처럼 모락모락 피어 오르기 때문이다.

문학에서는 이처럼 논리적이고 이성적이 아니라

의식 바닥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그야말로 (혹은 )리는 대로

적어나가는 기법을 '의식의 흐름'이라고 하는데

지금 그대들은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으로 이야기를 읽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의식의 흐름이니 뭐니 하면서

자꾸 시간을 끄는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눈치 Educated Reader 때문에

솔직히 고백하건대

글의 일관성을 유지하기가 힘들기에

의식의 흐름이니 뭐네 하면서

연막을 치는 것이다.

능력 없음을 은근 슬쩍 얼버무리고

넘어가려는 수작이다.

그러니 어쩌랴.

글을 쓰는 나는 말하자면  엿을 파는 엿장수고

여러분들은 엿장수의 가위질에

일희일비해야 하는 소비자인 것을.

하나,  혹은 신문지 묶음에

얼마 만큼의 엿을 받아 먹는가는

오로지 엿장수의 가위질 하나에 달려 있음을 기억하길 바란다.

가져온 물건에 엿을 턱없이 적게 받았다고 볼멘 소리 해보아야

여기선 통용되질 않는다.

엿장수의 가위질은 엿장수의 자존심이며 고유 권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분에 엿장수가 가위질을 하든

메트로놈 들고 쫓아 다니며 세질 말길 바란다.

다시 말하건대

여장수의 가위질은 그야말로

'엿장수 맘대로'이다.

엿장수 비위나 슬슬 맞추다가

뵈기로 공짜 엿이나 맛보는 것이 장땡이다.

말만 잘하면 판의 ' ( )먹어라'하고

기분 좋게 먹이고 손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말이다.

어린 시절 엿장수같이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안에 쓸모 없는 쓰레기를 가지고 주시는 것만도

고맙고도 황송한데 엿까지 먹여 주니

그보다 고마울 데가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엿장수 아저씨께 들고 고물이 동이 났다.

어린 마음에 엿은 먹고 싶은데 집안엔 쓸만한(?)고물이 없어서

고심고심한 끝에 양은 주전자를 들고 같다.

엿장수 아저씨는 말도 없이 양은 주전자도

냉큼 받아 주었다.

엿장수 아저씨가 물건이라고

받아 줄까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엿장수 아저씨가 누군가.

아이들 마음을 우선으로 삼는 박애주의자가 아니던가?

그날 나는 엿을 바꿔 먹는 성공했고

대신 물건만 가져가는

엿장수 아저씨께 물건을 가져가서

엿장수 아저씨를 난처하게 만든 죄로

할머니께 죽도록 야단 맞은 기억이 난다.

그날 이후로 남에게 곤란한 부탁 하는

예의 바르고 반듯한 사람으로 성장할 있었음도

물건도 마다 않고 엿으로 바꿔

엿장수 아저씨의 하해같이 넓은 마음씨 덕이다.

 

 

나도 크면 엿장수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리라고

뵈기 엿을 먹으며 결심하곤 했었는데,

동네 아이들의 복지와 영양을 위해 힘을 쏟던

엿장수 아저씨의 숭고한 정신을 따르기는 커녕

건사하기에 바쁜 사람이 되어 있다.

이렇게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보며

불현듯, 느닷 없이, 그리고 뜬금 없이,

오늘 옛날  엿장수 아저씨의

가위 소리가 그리워지는 왜일까.

 

 

장수가 길을 막더니

오늘은 엿장수가

엿가락처럼 이야기를

길게 길게 늘이느라 날이 새고 말았다.

 

 

5.

 

 

오늘은 작심하고 무조건

재모의 야구 사랑 이야기만 하기로 한다.

재모와 나는 성남 중학교 21 졸업생이다.

1970년도에 입학을 했으니

후년이면 성남학교와 인연을 맺은 지도

40, 불혹을 맞게 된다.

 

 

처음 성남 중학교를 찾았을

인상은 광활한 운동장이었다.

입학하기 성남학교에 대해 들은 것이라고는

영등포에서 제일 좋은 학교라는 것과

야구 하기로 유명하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 뺑뺑이 돌려 성남 학교에

당첨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인생의 대박은 그것으로 마지막을

고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어쨌거나 우리가 중학교에 입학 하던 해에

고등학교 야구팀이 황금사자기를 '먹었다.'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 했다" 하는 것과

"황금사자기를 먹었다." 하는 사이의

아찔하고도 미묘한 차이를

느껴보기 바란다.

아무리 의식의 흐름이니 어쩌니 하고

연막을 치긴 했어도

단어 하나마다 신경을 쓰고 있음을 알아주길 바란다.

 

 

홍수환이 45기라는 말을 만들어 내면서

권투 세계 챔피언이 되었을

자기 엄마와 전화 하던 모습을 기억하는가?

 

 

"엄마 챔피언 먹었어!"

"그래, 대한 국민 만만세다!"

 

 

이렇게 통화 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격식을 갖추어서 다음처럼 말한다면

감격이 제대로 살아나겠느냔 말이다.

 

 

"어머니 제가 세계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장한 일을 했구나."

 

 

그런데 성남이 황금사자기를 '먹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바로 우리가 입학하던 해에 말이다.

당연히 먹는 음식을 먹어봐야

그리 감동까지 일은 별로 없을 같다.

그러나 음식이 아닌

'황금사자기', '챔피언 벨트' 같이 음식이 아닌 것을 먹는 일은

먹는 과정은 상당히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일단 먹고 나면 쾌감과 흥분은

음식을 먹고 후의 그것과는 비교도 되질 않는다.

 

 

까까머리 우리들은 얼마나 흥분했었는지 모른다.

그러니 틈만 나면

야구 비슷한 놀이를 하며 놀았다.

박카스 뚜껑을 공대신 쓰는

박카스병 뚜껑 야구라든지

아직도 명칭이 찜뽕인지 찐뽕인지

아니면 짬뽕인지 정확히 없는 공놀이도 즐겨 했던 같다.

박카스 뚜껑의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동아제약도 대박이 났다.

동아제약의 성장 뒤에는

성남학교가 황금사자기를 먹은

사건이 있었음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우리는 학교가 끝나고서도

야구부의 연습이 끝나야 집에 돌아가곤 했다.

 

 

황금사자기를 먹고

월요일 조회 시간에 이사장이었던 김석원 할아버지께서

야구 경기를 재방송 하셨다.

당시 벌써 여든이 넘으셨던 같은데

비교적 소상히 기억하고 있었던 같다.

"일번 타자 육강수가 딱하고 치니까 홈런이야!

" 다음엔," 그리고 다음 타자 이름은

생각이 나질 않자

뒤에 있던 선생님 분이 황급히 할아버지 옆으로 가서

이름을 아려 주자 재방송은 속개될 있었다.

참고로 우승할 투수는 노길상 선배님이었다.

 

 

다른 선수들의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황금사자기를 '먹은' 사건은

우리같이 살짜리 아이들에게나

여든 할아버지에게나 없이

같은 흥분을 가져다 주었다.

살아가면서 이렇게 음식이 아닌 다른 무엇을 먹는(?) 일은

예외 없이 흥분과 카타르시스를 삶에 선사해주곤 한다.

 

 

흥분하신 할아버지는 3 야구부원에게

금반지 돈씩을 선물하셨는데

미국의 월드 시리즈 우승반지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당시에 벌써 미국 메이저 리그 야구를 즐겨 보셨을까?

 

 

때부터 우리는 야구에 중독되기 시작했다.

연말이면 10 야구광을 뽑는데

재모와 함께 이름도 후보에 올랐다.

하기야 야구라고 하면

빠지지 않고 구경을 다녔으니까-----

지금도 있는지 모르지만

때는 주로 동대문 구장에서 야구 시합이 벌어졌다.

경기장 내에서는 술을 없으니

양동이 같은데다 쏘주를 담고 그걸 밧줄을 이용해서 경기장 안으로

가져 들어가 팔았는데

때문에 취한 사람들끼리

싸우는 일도 자주 구경할 있었다.

가끔씩 운동장 안으로

먹고 이상 술이 없어서 열을 받았는지

아니면 자기가 응원하던 팀이 시원칠 않았던지

분노로 가득 술병이 날아들곤 했다.

 

 

그리고 우리 학교 시합이 있는 날이면

대학 다니는 졸업생들이

예쁜 여자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응원하는 모습을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설마 여대생이 그렇게 예뻤을까 하는 의문이 들긴 하지만)

경기가 손에 땀을 쥐게 정도로 흥미가 있지 않을 때는

흘긋흘긋 여대생들을 훔쳐보는 것이

경기 보는 것보다 재미 있었다.

그리고 내가 대학에 가면 멋진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와서

꼬마 후배들 앞에서

한껏 으시대리라고 속으로 상상을 하곤 했다.

가지 고백하는데,

예쁜 여자친구를 만들 수만 있다면

우리 학교 야구 팀이 져도 상관없으니

제발 예쁜 여자 친구와 함께 야구 구경할 있게 주십사고

소원을 빌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다음부터 성남은 오늘 날까지 그리 좋은 성적을

거둔 같지는 않다.

어디까지나 마음 속으로 일이니

변변치 않은 성남학교 야구부의 성적에 대한

법적 도의적 책임이 없음을 자리에서 분명히 밝힌다.

 

 

엷은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야구장에

선배님 따라 왔던 여대생 누나.

바람결에 치맛자락이 살랑거리면

마음은 치맛자락보다도 훨씬 많이 흔들리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번도 모교의 시합을 보러 야구장에 적이 없다.

 

 

교생실습 때문에 대학 4학년

성남 중학교에서 달을 보낸 것을 마지막으로

야구장은 물론

모교를 찾은 적이 없다.

 

 

기억 속에서도 사라져 갔다.

모든 기억과 시간들이-------

 

 

그런데 불혹을 넘기고

지천명의 나이도 넘긴 지금에서야

그렇게 흘러간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피어 오른다.

내가 지워버리고 싶었던

기억들은 원죄처럼   핏속에 흐르고 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수필가 김소운 선생의 중에

'나는 어머니가 문둥병자일지라도

나의 어머니를 클레오파트라와도 바꾸지 않겠다'

라는 구절이 있다.

내가 성남에 대해 가지고 있는 어둡고 음습한

기억들 또한

바꿀 없고 바꿔지지도 않는 것이다.

 

 

"바꿀 없다면 사랑하라."

 

 

나는 지금  해묵은 기억들을 끄집어 내어

시간들과 화해하고 있다.

 

 

바꿀 없는 기억 속의

공간과 시간 속에 함께 있었던 그대들이여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6.

 

오랜 만에 자판 앞에 앉으니

어디까지 갔는 , 어디에 있는 헷갈린다.

그래도 누가 무어라 해도 무소의 뿔처럼 가기로 한다.

 

그렇게 황금사자기를 먹고 후에

우리의 야구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야구가 우리의 전부였다.

꿈도 야구 꿈만 꾸었다.

 

 

특히 재모는 야구 방망이를 들고

용마산에 올라가 수련을 하기 시작했다.

(예민한 사람, 그리고 교양과 지식이 풍부한 사람들은

이제껏 빳따라고 하던 용어가 방망이로 바뀌었음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갸우뚱거렸을 것이다.)

이유는 계속 읽어가다 보면 알게 것이다.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는 부단한 수련을 통해

재모는 지상에 발을 붙이고도

휘두르는 방망이에서 발생한 바람으로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리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렇게 날아가는 새들을 떨어뜨리다 보니

많던 용마산의 소나무에 기생하던

송충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송충이를 잡아먹던 새들의 숫자가 줄어드니

송충이의 숫자가 밖에--------

 

그러니 학교 당국은 학생들을 동원해서

송충이를 잡게 했다.

그러니 공부는 무신 공부.

고등학교 일차 입시에 실패하고

다시 성남 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했던

우리 친구들의 슬픔의 원인을 굳이 찾자면

8할은 재모에게 있었다.

특별히 재모의 야구 사랑 때문이었음을

우리 성남 중학교 출신 친구들은 알고 있는지-----

지금 오랜 시간이 지나서 비밀이 해제된 문서를

찾아보면 당시 상황을 좀더 소상히 있을 텐데

시간 없음으로 그냥 지나쳐야  겠다.

 

날아가는 새를 떨어뜨릴 정도의 내공이 쌓였던

재모의 방망이 실력으로

대신에 송충이들을  쓸어버렸으면--- 하고 속으로 바란 적이 있었다.

그리고 많이 야속하기도 했었음을

이제야 밝힌다.

그런데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무 것이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재모 같은 작은 거인의 입장에서 보면

소나무 사이로 느릿느릿 기어가는 송충이를

방망이 바람으로 해친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었던 같다.

그러니 우리 편하자고

방망이 바람 번으로 송충이 일당을 일망타진 하라고

부탁했었더라면

재모의 자존심도 자존심이려니와

재모의 뜻을 꺾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재모가 뜻을 마음 속에 품고 있었지만

친구들의 사소한 고통을 보고도 하지 못하는

여린 마음의 소유자이기도 까닭이다.

 

재모의 방망이 휘두르기 수련은 계속 되었다.

여기서 훈련이나 연습이란 말을 쓰지 않음을

여겨 봐주기 바란다.

단순한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부패한 , 고인 , 껍데기, 게으름같이

온갖 어둡고 부정적인 것들을 마음 속에서 몰아내고

바람을 일으키는 일종의 거룩한 수련의 경지에서

그리 했었다.

어떤 친구의 고증에 의하면

방망이를 휘두르는 재모의 표정에는

진지함을 훨씬 뛰어넘은

숭고하고 거룩한 어떤 것이 있었다고 한다.

다른 친구의 증언으로는 방망이를 휘두를

재모 뒤에서는 후광 같은 것이 비췄다고 하는데

내가 직접 적이 없는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결국 재모가 방망이를 휘두르면

높이 날아가는 비행기가

제트 기류를 맞닥뜨린 것처럼 휘청거렸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아마도 비행기 마저 떨어뜨릴 있는 내공은 있지만

박애주의자 재모가 그리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글을 읽는 여러분 들도 주지하는 사실이다.

 

하루는 밤이 이슥할 때까지 용마산에서

방망이 휘두르는 수련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백발에 수염을 노인이 옷을 입고

재모 앞에 나타났다고 한다.

이런 장면은 '전설의 고향' 따위의 드라마를 많이 사람이면

'! 용마산 산신령' 하고 금방 알아차릴 수가 있는 법이다.

성남 학교에서 뛰어난 인재가 나타날 때면

어김 없이 나타난다고 하던

용마산 산신령이 재모 앞에 나타난 것이다.

산신령은 이전에도, 재모 이후로도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하니

재모가 어떤 인물인지 시사하는 의미가

사건이라고 있겠다.

 

산신령은 재모의 방망이 수련을 지켜보다가

결국 재모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내가 오늘 너에게 선물을 하나 주겠다."

( 부분은 에코가 들어가야 하나 ,   솜씨로써

음향효과까지 내기를 바라지는 마시라.)

그러면서 몸에 품을 있는 어깨 넓이 만한

야구방망이 하나를 재모에게 주더니만

홀연히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산신령이 등장하고 사라질

안개 같은 것이 자욱하게 피어올랐음도 머릿리속으로 그려들 보시라.)

 

산신령이 재모에게 방망이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을 인물임을 알아본

산신령의 선물이었다.

 

개화에 뜻을 두고 있었던

재모에게 있어서 방망이는

마치 유비에게 관우나 장비, 그리고 제갈공명과 같은

사람을 얻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이상 무엇을 기다리고

무엇을 바랄 있었으리요.

 

재모는 드디어 강북으로 진출했다.

 

일명 북벌이 시작된  거디었던 거디었다.

(철자가 틀렸다고 무어라고 하지 마시길 바람.

무성영화 시절의

변사의  피를 토하는 듯한 비장한 목소리를  연상하시길---)

 

영등포에서는 없었던

개화된 세상으로의 오딧세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낙후된 영등포에 빛을 밝혀주려는 순수한 열망으로 시작된

재모의 강북진출이 탄탄대로를 걸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글을 이젠 그만 읽으시길 바란다.

그런 사람들에게 일일이 사실 설명을 하기도 힘이 딸리기 때문이다.

일종의 상식이니까-----

그러니 상식 밖의 사람은 가라.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들만이

글을 계속 읽어나가길 바란다.

 

이곳 저곳을 둘러보는 재모 앞에는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릴 다른 동네를 지나칠라치면

어디선가에서

불량기 있는 녀석들이 앞을 가로막아 서서는

낯선 이방인을 아래로 훑어보며

도대체 허락도 없이 자기 동네에

발을 들여 놓았는

사뭇 위협조로 엄포를 놓곤 하던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모르긴 몰라도 것이다.

재모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발길이 닿는 곳마다

극심한 저항에 직면했다.

뜻을 품고 가는 사람의 고독감이 바로 그것이다.

파이프며, 같은 흉기로 무장한 조직원들과

맞닥뜨린 적이 어디 번이었던가.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번도 아니고

번씩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재모가 누구인가.

재모는 재모였다

그러한 난관은 눈에 눈곱을 띠는 일도 되질 못했다.

처음엔 말로 점잖게 타이르다가

도저히   , 바로

산신령이 하사한 방망이가 위력을 발휘했다.

휘두르면 명이 한꺼번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처음엔 방망이를 그냥 휘둘렀는데

실수로 방망이에 직접 맞는 사람도 나타났다.

겉으론 보기엔 멀쩡해도 속까지 골병이 들었다.

박애주의자, 온정주의자 재모의 마음이 아팠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방망이 겉에 솜을 두껍게 입혔다.

혹시 실수로 방망이에 직접 맞아도

피해를 극소화 하자는

재모의 넓은 마음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 방망이' 였던 것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 방망이' 탄생에 얽힌 하나의 가설이 있다.

'솜방망이' 맛을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재모가 어떤 사람인지 뒤를 캐는 사람도 생겼는데

모든 것을 비밀로 했던 까닭에

겨우 알아낸 것이 재모의 성이 ''씨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 방망이'라고 하던 것이

재모의 방망이에 솜이 덮인 것을 직접 사람들 사이에서

' 방망이'라는 명칭이 힘을 얻게 되었다.

 

소문만 들은 사람이 어떻게 직접 사람을 이길 있겠는가?

촛불 가지고 켜진 야구장 조명탑 앞에 있는 꼴이다.

 

지금 우리가 쉽게 '솜방망이'라고 조롱쪼로 이야기 한다.

그러나 원래는 재모의 인간 사랑하는 마음이 흠씬 녹아 있어서

연약하게 들리면서도

재모 앞을 가로막는 세력에게는 서릿발처럼 날카롭고 단호한

물건이 ' 방망이', ' 방망이' 것이다.

그러니 요사이 검찰이 기소를 하면서 ' 방망이 구형'이니 어쩌니

하면서 '솜방망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는 것을 보면

분노와 경악을 금치 못한다.

 

마디로 재모의 '() 방망이'

재모의 인간에 대한 없는 사랑과

부패와 구습 타파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재모의 화신인데

요사이 원래 숭고한 의미가 퇴색해가는 것을 보면서

이렇게까지 되게 방치해둔 것이

우리 모두의 책임인 같아

가슴이 아프다.

 

결국 재모의 활약으로 강북에서 활동하던

조직들의 뿌리가 흔들리게 되었고

이상 재모의 북벌의 영향 때문에

어디론가 새로운 거처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그들이 눈을 돌린 곳이 강남이었다.

때는 영등포를 염두에 두었는데

포기하고 말았다고 한다.

영등포가 어디인가?

바로 재모의 뿌리가 있는 곳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어둠의 세력들의 정보력이

당시에도 정밀했었던 같다.

 

재모가 강북으로 진출하고 얼마 후부터

강남 개발의 붐이 일었다.

개발이니 어쩌니 하지만

강남 개발의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재모였다.

재모 때문에 이상 붙일 곳이 없어진 세력들이

새로인 눈을 돌린 , 바로 그곳이 강남이었다.

강남의 현재모습에 대한 공로는 대부분

재모에게 있음을 사람들은 알기는 하는 건지------

 

오늘도 한강은 없이 흐르고 있다.

재모도 일엔 대해선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재모가 휘둘러 일으킨 바람이

지구를 돌고 돌아

오늘은 태풍으로 우릴 찾아오고 있는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