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성곽 둘레길 사진 산책
고등학교 동기들과 함께 걸었던
한양 성곽 둘레길을 사진으로 더등머 본다.
모이기로 한 운현궁의 현판.
머물렀던 호텔에서 멀지 않아 천천히 걸어서 10 여 분 정도 걸린 것 같다.
운현궁은 대원군이 살던 곳인데
관상감의 다른 이름인 서운관이 있는 곳의 고개라고 해서
운현궁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굳이 한글로 이름을 짓는다면 구름재라고 할 수 있을까?
건물의 마루를 보니 여간 세밀한 솜씨가 아니다.
이런 집에서 한 번 살아 볼 수도 없었던 목수의 대패질.
마루 저 편의 소나무는 무심하게 푸르다.
아름다운 한옥의 구성
운현궁을 한 바퀴 돌아 나오니
친구들이 꽤 많이 모여 있다.
운현궁의 문턱.
아들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은 여기서 정치를 했다.
권력에 줄을 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재물을 들고 이 문턱을 드나들었을까?
궁으로 가는 직통길이 어딘가에 있었다고 하던데---
드디어 걷기 시작.
길가의 장식
쇠는 녹이나고
나무의 페인트는 벗겨졌다.
시간의 조화
내 욱신도 그러하다.
무슨 물건을 파는 가게였더라?
뭘봐!
괜히 가슴이 뜨끔.
언덕을 올라 가니 중앙 중, 고등학교
고려대학와 같은 재단인데 건물도 석조 건물로
비슷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사적지라 건물에 비가 새도
맘대로 수리도 못 한다고 한다.
안내를 맡은 친구는 중앙 중학교 교장으로 작년에 은퇴를 했다.
전언에 의하면 암으로 투병을 했는데
운동 삼아 열심히 걷다 보니
한양 사적지에 괸심이 생겼고,
말길이 닿는 곳에 대해 공부를 해서 이젠 전문가가 다 되었다고----
(정말 그렇다.)
그 덕인지 병도 다 낳았다.
드디어 성곽이 보이고
성 아래 집들의 지붕이 보인다.
셀카봉을 들고 종횡무진 친구들 사진 찍기에 바쁜 친구.
해군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함장 생활을 하고 전역했다.
성산대교 어딘가에 이 친구의 이름이 쓰여진( 딴 )전투함이
육지 위에 있다고 하던데 보지는 못 했다.
너무 자상하고 마음이 아름다운 친구.
저 셀카봉이 탐이 나서 갈취해서 마님께 진상했다.
(친구는 더 좋은 것, 새 것으로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여기가 성북동이라고 했다.
성의 북 쪽.
좁은 골목길로 이어진 마을,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가 생각났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
정말 콩알 하나 마음 편하게 찍어 먹을 마당이 없는 곳이다.
시인 김광섭이 이 시를 쓸 때만해도 건너 편의
어마무시하게 큰 집들은 없었을 때인 모양이다.
채석장의 돌 깨는 소리도 멎어서
조용하기만 한 성북동.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 앞.
여기도 삶이,
사람이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봄이면 저 플라스틱 통에서
새로운 식물의 싹이 돋을 것이다.
아니 돋아나야만 한다.
굽은 등,
굽은 길.
노인의 등이
골목길을 닮았다.
노인의 삶이 저러하지 않았을까?
낮은 지붕.
삶에도 지붕처럼
높고 낮은 것이 있을 것이다.
길 이 편과 저 편의 지붕 높이가
이리도 차이가 난다.
성곽의 모습.
삶의 참 고단한 모습이 보인다.
나란히 나란히 나란히
계량기는 옆으로 나란히
화분은 사선으로 나란히.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 같은 삶.
천장은 낮지만
고개는 꼿꼿한 삶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