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근이는 그야말로 진상이다.
진상이란 말은
한국에 있을 때 들어 본 기억은 없는 것 같고
새로 만들어진 말인 것 같은데
그리 좋은 의미는 아닌 것으로 파악된다.
가령 술 마시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든가
옆 사람에게 시비를 거는
소위 밥맛 없는, 혹은 재수 없는 사람 앞에
분풀이 하듯 갖다 붙이는
일종의 명에롭지 못한 관형어로 나는 이해하고 있다.
꼭 술과 관련된 사람 뿐 아니라 생활 전반에 걸쳐서
목격되는 목불인견의 인간부류가 바로 '진상'이디.
동기들 모임에서 만났던 스물 몇 명 친구들 중
진상이라는 관형사와 가장 잘 어울리는 이를 고르라면
난 서슴없이 철근이를 첫 손가락으로 꼽을 것이다.
누구를 위한 환영회인지
큰소리로 다른 친구들의 목소리를 제압하며
자기가 환영 받아야 할 사람처럼
좌중을 압도했다.
하기야 그 큰 목소리 때문에
고교 시절엔 학도 호국단의 대대장으로 맹활약 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리 사사로운 술좌석에서
큰 목소리를 과시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술자리가 파하고 헤어져 돌아오면서
같은 전철을 탔다.
그런데 웬 청년이 그야말로 술이 취해 비틀거리며
진상을 떨고 있었다.
젊으니까 그러려니 했다.
"제가 술 좀 먹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그청년이 하필이면 철근이 앞에 와서
고개를 숙이며 "죄송합니다."
하며 사과를 하는 것이 아닌가?
진상이 진상의 고수를 알아 보고 예를 갖추는 것 같았다.
철근이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조심해."
그 청년은 90도로 고개를 숙이며
"조심하겠습니다."
하며 빈 자리를 골라 앉았다.
그리고 이내 순한 양이 되어 제 갈 길을 갔다.
'도낀 개낀'
누가 조심해야 하는지----
만약 우리들 중 다른 사람이
그 청년에게 곱지 않은 눈길을 보냈다면
그 청년은 술김에 우리에게 대들어서
곤란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을 지도 몰랐다.
그런데 철근이가 누군가.
에비역 중령.(학도 호국단 대대장)에다가
무인의 용모로는 아주 출중해서
솔직히 고교 시절 그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다행히 그는 다음 역에서 나와 헤여졌다.
그냥 가는 게 서운하다고
전철의 닫힌 창 사이로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정 많은 친구-
그의 얼굴과 그의 정은 반비례한다.
다른 친구로부터
철근이가 대표로 있는 회사의
공장에 큰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식을 듣고 공장까지 찾아갔던 친구의 이야기에 의하면
아주 의연한 태도로
그 복잡하고 상심한 상황을
실타래 풀 듯 잘 풀어내고 있다고 한다.
나 같으면 자리 보전하고 상심에 빠졌을 텐데
먼데서 친구가 왔다고
찾아와 큰 소리로 분위기를 띄우는 친구 오철근을 보며
그 귀여운 얼굴(?)을 한 번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자기 할 일 똑 부러지게 하면서
친구들과의 우정에도 제일 선봉에 서는
의리의 사나이 오철근은 누가 뭐래도 *'진상'이다.
*진(정한)상(남자) 오철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