립스틱 짙게 바르고
어제는 주일이었고,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가 계신
동작동 국립묘지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러니 아침에 일어나 목욕재계하고 마음의 깃을 잘 다듬었다.
우리는 그제 오후에 공항 철도가 지나가는 운서역이라는 곳 근처의 게스트 하우스에서
하룻밤을 아주 경쾌하게 잘 자고 행복한 상태로 잠에서 깨어난 상태였다.
그런데 국립묘지로 가기 위해 게스트 하우스를 나와 역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갑자기 아내가 나를 보더니 아주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머리에 뭐 발랐어요?"
"아니."
부정의 대답을 들은 아내의 얼굴에 아주 낭패스러운 표정이 거렸다.
"우리 다시 돌아가요."
일수불퇴, 한 번 나왔으면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는 나의 평소 생활철학을 배반해야 할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는 내 머리가 흘러내리는 꼴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영화배우 백윤식을 보면
아내는 "이마 참 시원하다."며 감탄을 금하지 못한다.
감탄할 일이 따로 있지, 준수한 용모나 얼굴이 아니라
외간 남자의 이마를 보고 감탄하는 아내를 보며 뜨악해지는 나를 종종 발견하곤 한다.
아내는 아침에 샤워를 하고 머리에 빗질은커녕 아무런 인공적인 손질을 하지 않은 내 머리가
이마를 덮고 있는 것이 몹시 못마땅했던 것이다.
사실 나는 이마도 좁을 뿐 아니라 두상이 머리를 곱게 옆으로 넘어가 머무는 그런 형태를 지니고 태어나질 못했다.
그러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다닐 때부터
내 머리는 늘 이마를 덮은 상태였다.
아마도 내 이마는 해를 받지 못해서 군대 가기 전까지는 무척 하얬을 것 같다.
그런 내 앞머리가 옆으로 넘어가 하루 종일 얌전히 한 자리에 머무는 기적이 일어났으니
아내가 얼굴에 바르는 립스틱 모양의 무슨 크림 같은 것 덕이었다.
외출할 때마다 아내는 내 머리에 그놈을 살짝살짝 발라 옆으로 넘겼다.
머리가 이마로 흘러내리지 않는 내 머리를 바라보며
아내는 기막힌 자신의 묘수에 감탄을 하며 흐뭇해했다.
어제 아침엔 머릿속에 여러 가지 일정과 계획에 바쁜지
숙소를 떠나기 전에는
아내가 내 머리를 살피는 일까지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 같다.
숙소를 떠나서 비로소 이마를 덮은 내 머리를 발견한 것이었다.
다시 돌아가기를 완강히 거부하는 나의 의지를 꺾지 못한 아내는
자신이 메고 나온 가방에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빨간 립스틱이었다.
그리고는 아주 능숙한 손짓으로 아무 주저함도 내 머리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기 시작했다.
이건 '빨강머리 앤'도 아니고 나를 빨강머리 존(John)으로 순식간에 바꿔 놓았다.
립스틱이 묻어 빨긋빨긋해진 앞머리카락을 보며
아내는 뻘건 색으로 하이라이트를 한 것 같다며 "멋지다 John!"을 연발했다.
사진을 찍어 나에게 보여주며 확인사살까지 마쳤다.
70 살이 다 되어 가는 남편에게 이런 만행을 마다하지 않고 저지르는 아내를
이렇게 보고만 있어야 하는 나는 과연 누구이며 어디에 서 있는가
하는 심각한 실존적 고민에 잠시 빠졌다.
나는 상실의 시대, 곧 내가 어디에 있는지 좌표마저 찍지 못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어제 하루 빨강머리 John은 그 상태로 동작동의 국립묘지에 가서
돌아가신 부모님을 뵙고,
흑석동 성당에 가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기념하는 '주님 수난 주일'을 기념했다.
이렇게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를,
부모님은, 그리고 또 군중 속을 지나고 있던 예수님은 어떤 눈으로 바라보셨을까?
오늘 저녁엔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을 예정이다.
그러지 않아도 계획이 많은 아내의 걱정을 덜기 위해서라도
샤워를 하고 자진해서 아내에게 머리를 올려달라는 부탁을 정중히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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