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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산골일기, 셋째 날-성 금요일

산골일기, 셋째 날-성 금요일

드디어 새 집으로 몸을 옮긴 이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해가 얼굴을 내밀었다.

잔잔히 내리던 비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내 짧고 거칠게—게릴라처럼—후드득 쏟아졌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낮게 드리운 하늘을 따라 구름이 스쳐 지나갔다.

낮은 곳을 맴돌던 구름은 이내 사라지고, 높은 구름이 하늘을 덮었다.

그러다 다시, 그 틈 사이로 해가 고개를 내밀었다.

기온도 서서히 오르기 시작했다.

 

성금요일이었다.

 

에스터 부부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호박으로 죽을 끓여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비로소 산골에서의 삶이 시작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호박죽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색은 유난히 선명하고 깊었다.

아무것도 더하지 않은 재료에서 배어 나오는 단맛이 자연처럼 소박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레고리안 성가가 담긴 LP를 턴테이블에 올렸다.

천장이 높은 집 안은 어느 순간 수도원이 된 듯했고 아름답고 소박한 그레고리안 성가가 공간을 채웠다.

아파트에서 듣던 때와는 달리, 음악은 살아 움직이며 내 안으로 깊숙이 스며들었다.

 

오후 세 시, Stamford에 있는 Sacred Heart 성당에서 거행되는 성금요일 주님 수난 예식에 참석했다.

집에서 성당으로 가는 길의 나무에는 물이 오르고 있었다.

예식에 참여하면서 물기 없이 메마른 나무 십자가가 생명의 부활을 상징하는 신비를 묵상했다.

나는 무릎을 꿇고 나무 십자가 아래쪽에 입을 맞추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을 어귀의 농장에 들렀다.

달걀을 사기 위해서였다.

성당으로 가는 길에 우연히 눈에 띄어 생각 속에 새겨두었던 곳이다. 

농장 안주인으로부터 아직 준비된 것이 없었지만,

한두 시간 뒤에 다시 연락하면 두어 더즌쯤 마련해 주겠다는 답을 들었다.

집에 돌아와 데크에 소박한 밥상을 차려 저녁을 먹었다.

식사를 마친 뒤 다시 농장에 연락하니 달걀이 준비되었다고 했다.

자연에서 자란 닭이 낳은 달걀은 흰색, 갈색, 푸른빛을 띠는 것, 작은 점이 박힌 것까지, 저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토요일에 찾아올 장인어른과 딸네 가족에게 건넬 선물로 몇 판을 샀다.

산골에서의 삶이 이렇게 한 걸음씩 시작되는 듯했다.

 

밤이 찾아왔다.

침실 대신 선룸에 매트리스를 깔고 누웠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눈이 떠졌다. 스카이라이트와 삼면의 창으로 별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다시 잠을 청했지만 쉽지 않았다.

흐린 하늘 사이로 별빛이 수줍게 떠올랐다가, 이내 구름에 덮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순간, 구름 속에서 달이 얼굴을 내밀었다.

빛 하나 없는 산골에서 보는 달빛은 유난히 밝았다.

보름에 가까운 달은 구름 사이를 오가며 한동안 숨바꼭질을 하다가, 결국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어둠이 깊어졌지만, 한 번 달아난 잠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밤을 온전히 건너게 되었다.

 

죽은 나무에 입을 맞추던 그 순간과,
생명을 품은 달걀을 들고 돌아오던 길과,
구름 속에서 끝내 모습을 감춘 달빛까지—

그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서 이미 시작된 부활의 기척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잠이 오지 않는 밤을 견디며,
나는 어느새 산골의 시간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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