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일기, 둘째 날
한국에서 돌아온 날, Rockaway의 콘도에서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낯선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앞으로 시작될 산골 생활에 대한 걱정이 마음속에 물안개처럼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장인 댁에서는 피곤 덕분인지 비교적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산골에서의 첫 밤을 맞았다.
전기도, 물도 없는 집.
그 첫 밤에 봄비가 우리를 찾아왔다.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수줍은 비였다.
밤 열 시쯤 자리에 들었다.
오래 잔 듯싶어 눈을 떴지만 겨우 한 시간을 잔 뒤였다.
다시 잠들기 위해 눈을 감았으나, 의지와는 달리 눈이 저절로 떠졌다.
침실을 나와 거실로 갔다.
저녁에 지핀 난로에는 아직 숯이 남아 은근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장작 하나를 더 넣자 불길이 맹렬히 살아났다.
몸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Sunroom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붕 위 창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피아니시모처럼 낮게 울리고 있었다.
마치 집 안의 잠든 사람들을 깨우지 않으려는 듯, 소리를 죽이며 내리는 비였다.
한참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다시 난로 앞으로 돌아왔다.
불을 바라보고, 다시 비를 듣고,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다.
시계는 어느덧 새벽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다시 자리에 누웠다.
이번에는 봄비처럼 얌전한 잠이 찾아왔다.
“더 잘 거예요?”
아내의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봄비처럼 부드러운 소리였다.
눈을 떠 보니 여섯 시를 조금 넘긴 시간.
“일어나야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도 몸은 이상하게 가볍고 상쾌했다.
먼 산에 걸린 구름처럼 부드러웠다.
그날 아침에는 전기 개통과 인터넷 설치가 예정되어 있었다.
하루의 시작은 자연스럽게 분주해졌다.
아내는 피크닉용 버너에 불을 붙여 물을 끓였다.
산속에서 맞는 첫 아침, 커피는 빠질 수 없는 의식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원두만 있을 뿐, 갈 방법이 없었다.
잠시 실망했지만, 다행히 남아 있던 가루커피를 발견했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 쓰지 않고 남겨둔 것이었다.
그 커피를 프렌치 프레스로 내려 마셨다.
맛은 조금 어색했지만, 그 순간의 공기와 함께하는 커피는 특별했다.
앞으로 오래 기억될 맛이었다.
산 위로 번지는 구름을 바라보며
이런 순간이야말로 산골에서만 누릴 수 있는 은밀한 행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덟 시가 조금 넘어 전기를 올렸다.
불이 켜지고, 냉장고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보일러도 작동했다.
전날의 막막함이 한순간에 풀려나갔다.
인터넷까지 연결되자 아이들과 친구들에게 안부를 전할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연결이 마음을 이어주는 일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소박한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아내는 부엌을 정리했고 나는 음향기기를 연결했다.
이 집에서 처음으로 듣는 음악.
턴테이블 위에 LP를 올렸다.
바늘이 닿는 순간,
임윤찬이 카네기 홀에서 연주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Goldberg Variations가 흘러나왔다.
어둠 속에서 불이 켜지듯,
그 음악은 우리 삶의 새로운 시작을 조용히 밝히고 있었다.
아내가 간절히 가고 싶어 했던 연주회 실황 녹음 연주였다.
여러 이유로 포기했던 그 마음이 남아 있었기에,
나는 그날 종로의 서점에서 이 음반을 망설임 없이 집어 들었다.
그날의 음악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었다.
우리 삶의 또 다른 문을 여는 작은 의식처럼 느껴졌다.
첫날의 걱정들은
둘째 날 아침이 되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자잘한 일들을 마치고 마을 우체국으로 향했다.
작은 공간 안에는 내 또래쯤 되어 보이는 직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사서함 신청서를 건네자, 말없이 열쇠 하나를 내어주었다.
사서함 152번.
앞으로 우리의 소식들이 그 안에 쌓일 것이다.
기쁜 소식이든, 힘든 소식이든.
문득,
우리 삶의 열쇠도 어딘가에 이렇게 맡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우체국 한켠에는 자유롭게 가져갈 수 있는 책과 CD가 놓여 있었고,
마을 사람들이 팔기 위해 가져다 놓은 달걀도 보였다.
고립된 공간 속에서도
사람들은 이렇게 서로를 이어가고 있었다.
우리의 삶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비록 산속에 있지만, 여전히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는 삶.
그날도 구름은 낮게 드리워 있었고,
간간이 비가 내렸다.
그러나 마음은
등불 하나 켜진 것처럼 따스하고 밝았다.
어쩌면 삶이란,
이렇게 하나씩 불을 밝히며 살아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산골일기, 셋째 날-성 금요일 (2) | 2026.04.05 |
|---|---|
| A Mountain Journal — Day Two (0) | 2026.04.03 |
| Diary in the Mountains – Day One (0) | 2026.04.03 |
| 산골일기, 첫날 (1) | 2026.04.03 |
| 립스틱 짙게 바르고 (2) | 2026.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