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일요일 아침,간단하게 커피와 베이글로 아침 식사를 마친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때였다.
아마도 축구에서 막 돌아온 나의 축구 이야기며
전날 밤 있었던 Brian(둘째 사위)의 킥 복싱 시합에서
KO승을 거둔 이야기 등이
베이글 맛을 내기 위해 발라 먹는 크림 치즈와 나란히
식탁 위에 올라 있었을 것이다.
우리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경기가 있었으므로
지영이와 Brian은 뉴욕에 있는자기 집에 가는 대신
간 밤을 우리 집에서 보낸 것이다.
지영이가 창 밖을 보더니
Jim 할아버지 집에서 Moving Sale을 하는 것 같다고 했다.
Jim 할아버지 집 주변엔 일요일 아침 시간임에도
벌써 한 손가락으로는 셀 수 없을 만큼의
차들이 몰려들었다.
하기야 올 여름 더위가 막 시작될 때
집을 판다는 광고가 집 앞에 붙어 있기는 했다.
그리고 훨씬 전
올 봄 동네 성당으로 주일 미사를 갔을 때
신자들의 기도 중에
Jim 할아버지의 부인 Marianne을 기억하는 걸 듣고서야
부인이 돌아가신 건 알았다.
하기야 작년부터 부인이 요양원 같은 곳으로
들어가셔서 Jim 할아버지 혼자 살고 계신 터인지라
머지 않아 Jim 할아버지도
우리 동네를 떠나실 것으로 짐작은 하고 있었다.
이젠 부인마저 세상을 뜨신 마당에
그 넓은 집에 덩그라니
혼자 사실 수는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어도
그런 시간은 저 멀리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아무런 말씀도 인사도 드리지 못했다.
Moving Sale을 한다는 것은
집이 이미 팔렸고
머지 않아 Jim 할아버지는
더 이상 우리 이웃으로남아 있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우리가 1993년,
그러니까 20년도 더 흐른 시간 속,
이 집으로 이사를 왔을 때
우리 집 주위로 가까운 다섯 집에
다섯 부부가 살고 계셨다.
그 당시 이미 노인이라고 해도 실례가 되지 않을 분들이
바로 앞집의 Maser 부부, 그리고 Maser 바로 옆의 Stromeyer(Jim),
마지막으로 뒷 집의 Mathew부부 - 이렇게 세 집이다.
나머지 두 집 부부는 나에게 노인 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심사인지는 몰라도
우리가 이사를 온 후
얼마 되지 않아 초로의 시기에 서둘러 동네를 떠났다.
우리만 아직 40줄에도 미치지 못한
그야말로 '영계'였다.
Jim 할아버지마저 동네를 떠나시면
이젠 Mathew 씨 부부만 남는데
팔십 중반을 넘게신 요즈음도 허리 꼿꼿하게
동네를 활보하신다.
그러면 나는 서열 2위가 되는 것이다.
'참 그 세월이라는게----'
지영이와 Brian, Robert(큰 사위)와
아내 나 - 이렇게
다섯이 길 건너 Jim 할아버지 집으로 갔다.
Jim 할아버지는 나를 팔 벌려 안아주셨다.
그 동안의 밀린 인사를 했다.
할아버지의 가족들 말고는
우리 동네에서
내가 Jim 할아버지와는 가장 친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아주 오래 전에 내가 Jim 할아버지에게
한 일년 동안 영어를 배운 적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부인 Marianne가 영문학 전공이고
아이들이 졸업한 고등학교 영어 교사를 했지만
Marianne은 서로 얼굴을 대하기엔
왜인지는 몰라도 껄끄로왔다.
우리는 영어 공부도 공부지만
살아가는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때로 나의 생각에 감탄도 하고
칭찬의 말씀도 해주셨다.
정작 영어 실력에 대해서는
아무런 칭찬을 듣지 못했다.
Jim 할아버지가 신부가 되기 위해
나이아가라 폭포가 있는
캐나다의 신학교에 다니던 이야기며
두 아들 이야기를 들은 것도
영어 공부를 할 때였다.
신부의 길을 포기하게된 연유는 묻지 않았다.
Jim 할아버지의 삶에서 가장 아픈 부분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두 아들 중 작은 아들은 고등학교 때 좀 놀았던(?) 모양이다.
그 학교 졸업생이라면 거의 다 가는 대학도 가지 않아서
두 분의 속을 어지간히도 썩혔던 것 같다.
우리 식구가 베이글을 사다 먹는
베이글 가게에서 빵 굽는 기술자로 일을 하고 있어서
새벽 세 시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일을 시작하는 작은 아들의 고단함을
Jim 할아버지는 늘 가슴 아파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에 베이글 가게에 들릴 때면
그 작은 아들이 있나 하고 유심히 살폈다.
가끔 막 구운 베이글을
매장으로 가지고 나오는 그를 볼 수 있었지만
아는 체는 하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 차고에서
팔아야 할 물건을 정리하는 남자를 만났다.
Jim의 작은 아들이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머리가 한 올도 남아 있지 않게 벗어져
금새 알 수가 있었다.
우린 처음으로 악수를 나누었다.
작은 아들도 나를 알고 있었다.
아버지에게서 들었다고 했다.
아버지 가슴을 아프게 하던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떠나는 길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차고 구석의 한 모퉁이에서
LP 판 몇 장을 골랐다.
바흐의 B 단조 미사곡과 베에토벤의 장엄 미사곡,
그리고 파바로티가 어린이 합창단과 불렀던
크리스마스 노래도 있었다.
나중에 보니 지영이가
에디뜨 삐아프와 메리 포핀스 OST같은 판을 이미 골랐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에디뜨 삐아프의 비 젖은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
밖은 아주 청명한 가을이었다.
Jim 할아버지도 한 때는 그 음악들을 심취해서 들으셨을 것이다.
아끼고 애착을 가지시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양원으로 떠나시는 지금
그것들은 다 짐이고 쓰레기일 뿐이다.
그 LP 음반들이
나에게는 조금은 경이롭고 감격스러웠다는 건
아직 내가 그리 나이 먹지는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알려 주는 것 같았다.
나도 언젠가 이 동네를 떠나는 날이 올 것이다.
그 때까지 난 음악을 들을 것이다.
판 한 쪽이 끝나면 돌려서 끼우거나
새로운 판을 올려 놓아야 하는 것처럼
나의 판이 끝나면
새로운 판이 올려질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은 언제가 되었건
날 찾아올 것이다.
그 날 난 Jim 할아버지의 마음을
조금 나누어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떠나는 날까지
Jim 할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그가 하는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일 것이다.
"지금이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는-----
지금 이 순간 행복하지 못하면
영원히 행복하지 못한 채
떠나는 순간을 맞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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