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봄이 오는 언덕에서 - Tallman Park

가을에 태어난 아이 2014. 3. 10. 22:53

봄이 오는 언덕에서 - Tallman Park

 

 

                                                                                                                                                         얼음장 밑으로 슬그머니 봄이 흐르고 있다.

 

 

 

어제부터 Day light savinig time (일명 써머타임)이 적용되었다.

눈이 아직 녹지 않았고 날도 추운데

써머타임이라는 말이 어색했다.

운동장에 나가 보니 아직 해는 얼굴을 내밀지 않았고

축구 회원 열댓명이

눈 위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밤 사이 내려간 기온 탓에

비교적 따뜻했던 토요일에

녹았던 눈의 표면이 다시 얼어버렸다.

 

차를 파킹하고 운동장 쪽으로 가려는데

눈 위는빙판처럼 미끄럽고

밟으면 킽으로 푹 꺼지면서

얼어 붙은눈 덩어리가 발목에 통증을 느끼게 했다.

 

발로 눈을 다져보았지만

얼었던 눈은 곱게 부서지지 않고

손바닥만한 크기의 날카로운

얼음조각이 되어 눈 위에 뒹굴었다.

걷기도 뛰거나 공을 찬다는 건

호날도나 박지성이 와도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하자는 회원들이 있었지만

내가 해산을 하자고 했다.

너무도 좋은 날씨에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축구를 포기하는 마음이야

안타깝긴 하지만

혹시라도 다치는 사람이 나오면

그야말로 소탐대실이 되기 때문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눈 위에 내려 놓고

집에 왔다.

 

아내와 하이킹을 가기로 했다.

Diner에서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10분)

Tallman State Park로 방향을 잡았다.

 

 

 

파킹장과 길 일부를 제외하곤는

눈을 치우지도,

그렇다고 눈이 녹지도 않았다.

언덕 위엔 아직 봄이라고 하기엔

깊은 겨울의 흔적만이 남아 있엇다.

 

 

지난 봄에 돋았던 잎이

이 겨울이 다 지나도록 아직도

가지에 붙어 있다.

물기가 다 빠진 나뭇잎들은

바람이 불면 마른 기침을 하는 소리를 냈다.

서걱이는 소리에도 물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물기가 다 빠진 나뭇잎-

 

그것은 존재인가,

아니면 비존재인가.

 

얼마 전 한국 신문 기사에서

약사인 아내가

죽은 남편의 시신과 몇 년을 함께

지내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처절한 존재에의 갈망.

마른 나뭇잎 스치는 바람소리가 아팠다.

 

 

 

허드슨 강의 갈대가 내리 보이는

언덕 꼭대기로 가는 길,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 눈 위에 화석처럼 남아 있다.

길 옆으로 위로 곧게 자란 나무들이

도열해 있다.

'나무들이 거기 그냥 있다'

라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나무 의장대가 우리를 맞기 위해

도열해 있고

우리는 그 사이를 사열하듯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떨까?

 

니이 들어가면서

이리 유치한 생각으로

나를 즐겁게 하며 사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내 속으로만 하는 생각이니

남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고,

누군가에게 들켜서

주책 맞다는 핀잔을 듣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길은 미끄럽고 불편했다.

 

 

 

쓰러진 나무,

그 위에 이끼,

그리고 그 위에 눈.

 

겨울 한 철 추위를 견디어 내면

생긴다는 나이테.

이젠 한 겨울을 견디어 냈어도

나이테는 더 이상 생기지 않는다.

 

이 나무는 존재인가,

아니면 비존재인가.

 

내 모습이 저 나무와 점점 닮아가는 것은 아닐까

 

 

얼고 눈 덮였던 도랑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눈이 덮여 아주 사라진 줄 알았는데

물은,

그리고 그 흐름은 사라지지 않고

눈 속에서 보이지 않게

이 겨울 동안 힘겹게,

그리고 눈물겹게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ㄹㅇ

 

 

 

겨울 동안 황량했던 빈 가지 위에

빨간 카디널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무어라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빨간 색의 봄소식이라도 가져 온 것 같았다.

 

갑자기 한국에서 보았던

빨간 우체통이 생각났다.

빨간 소식,

빨간 희망.

 

나에게 이 봄은

빨간 색, 그리고 청아한

카디널의 노래로 찾아올 것 깉다.

 

 

빈 나무 껍질.

우리는 겨울을 '빈 것'이라 정의해도 될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그러나 법정 스님이 말씀하신

비어서 오히려 '텅 빈 충만'의 계절.

 

난 무엇으로 겨울을 채워가며 살았던가.

 

아니면 무엇 하나 제대로 비우기나 하며 살았는가.

 

 

상수리 나뭇잎이 떨어진 자리에

눈이 깊이 파였다.

아무 무게도 없을 것 같은

나뭇잎 한 장,

그 존재의

 

무게.

 

 

정상에 오르니 Piermont의 언덕과 마을이 눈에 들어 왔다.

해, 그리고 구름이 만들어내는 그림자.

어느 사람은 햇살이 눈 부시다고 할 것이고

누구는 어두침침하다고 할 것이다.

같은 하늘 아래에서도

밝은 곳과 그늘진 곳이 공존한다.

 

 

 

나무에 가려진 갈대밭.

그 사이로 물이 흘러 강으로 나아간다.

 

 

 

다시금 느끼는 존재의 무게.

그대라는 존재,

그리고 나라는 존재의 무게는

얼마나 되는 것인지.

 

 

얼음의 결정.

두꺼운 얼음에는 결정이 없다.

얇은 얼음에 생기는 아름다운 결정.

혹시라도 내게 아름다운 결정이 보인다면

 

그것은 내 존재의 가벼움 탓일 것이다.

 

 

 

 

 

 

 

얼음장 밑으로 물은 흐른다.

겨우내 흐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얼음장 으로 흐르는 물 표면에

얼음장의 물그림자가 슬프도록 아름답게 비쳤다.

사라지는 것과,

게속되는 것.

 

순간과 영원.

존재였던 것과

존재인 것.

 

그렇게 봄이,

게절이 흐른다.

 

 

고개를 온전히 뒤로 제쳐야 볼 수 있는

키 큰 나무들.

나무 끄트머리께 무언가가 보인다.

봄과 함께 벌어질 그 무엇,

그걸 희망이라고 나즉이 불러본다.

너무나 혹독했던 겨울,

봄, 희망이라고

읊조리기라도 해야

봄이 걸음을 재촉하지는 않을까

 

 

움푹움푹 파인 곳에는 눈이 녹아

도랑물 흐르는 것이 보인다.

도랑이 거의 다 눈에 덮였어도

가끔씩 보이는 개울물이

봄을 실어 나르고 있다.

 

고이지 않고

멈추지 않고

흐르는 물이 바로 희망이다.

 

물이 흐르니

비로소 봄이 왔음을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