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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을 걸으며

가을에 태어난 아이 2014. 1. 12. 20:38

눈길을 걸으며

 

내가 한 철에 한 번씩은 걷는  Alpine의 산 길.

집에서 차를 타고 10 분 거리에 있기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곳이긴 하지만

자주 가지는 못 한다.

 

한용운의 '수의 비밀'이라는 시에서처럼

수를 빨리 완성하고 싶어서

수를 놓지 못하는 마음과도 같을 것이다.

 

늘 마음에 두고 가고 싶은 곳.

 

 때로는 누구와 함께 

때로는 나 혼자 걸으며

 나를 만나고,

또 길을 만나는 곳이기에

마음 한 켠에 간직하고 지우지 못하는

 마음의 고향이기도 하다.

 

허드슨 강 가의 벼랑 사이에 난 길을 걸으면

속세의 번뇌 같은 걸 잊게 되고

그러다 보면 내면의 속살이 드러난다.

목욕을 하면 묵은 육신의 때가 벗겨지듯

두 세 시간 혼자 걷다 보면

마음의 때가 저절로 벗겨져

마음이 가벼워짐을 느끼곤 한다.

 

눈이 내린 산길.

아침에 축구하러 갈 때는

섭씨로 영하 15,6도 되던 기온이

산길을 접어들 때는

영상과 영하의 경계까지 오른 것 같았다.

산길로 접어들자

안개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내 체온이 닫지 않는

겉 옷의 바깥 쪽에 내린 비는 잠시후엔

얼음 방울이 되어 맺혔다.

 

 

 

 

 

제법 풍성하게 내린 눈은 발목까지 쌓였다.

벌써 내 앞을 여럿이 지나갔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가려니

발길을 떼는 게 여간 힘드는 게 아니다.

발자국을 따라 걸으니 힘이 덜 들었다.

 

애초에 길은 없었다.

누군가 한 사람이 길을 내고

또 누군가가 그 발자국을 따르고----

그러니

' 길은 아무데도 없고 , 결국 길은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처음 길을 내는 자의 고통,

그 고독을 생각했다.

 

'나는 길을 내며 걷는 사람인가'

 

 

 

 

눈이 많이 내렸어도

모든 걸 다 덮지는 못했다.

물기가 다 빠져나간 채로

눈 사이에삐죽이 솟아 있는 풀 줄기,

그리고 나뭇잎. 

 

난 그걸 보면서

절망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지

아니면 희망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절망과 마주하든

희망을 발견하든

그건 보는 자의 몫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희망과 만나기 위해선

길고 지루할지도 모를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사야서를 관통하고 있는

'Remnant'라는 단어.

 

삶은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좋겠다.

 

 

 

갑자기 귀가 즐거워진다.

개울물이 흐르는 소리가 명랑했다.

섭씨 영하 20도까지 내려가는 추위에도

속까지 얼지 않고

고맙게도 물은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희망은 개울물로 흐르고 있었다.

 

물 소리가 주는 위로와 만났다.

 

 

 

 

'나무들 비탈에 서다'

 

황순원의 소설 제목으로 기억한다.

혼돈.

경사진 비탈의 경사에 수직으로 뿌리를 내린 나무는

제대로 자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들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늘을 향해,

그리고 지구 중심을 향해 뿌리를 박은 나무만이

살아 남는다.

 

뿌리 내리는 일은

비탈에도 희망을 심는 일이다.

 

 

 

 

작은 폭포에서도

얼음장 밑으로

힘차게 물이 흘러 내리고 있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의 길.

 

흐르는 물은 얼지 않는다.

얼음으로 덮인 것 같아도

 그 속엔 물이 흐르고 있다.

 

그래서 나는 흐르는 물을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싶다.

 

가장 낮은 곳에서

살아 꿈틀대며 움직이는 물의 힘.

 

 

 

갈랫길

위로 가면 산 길을 계속 걷는 것이고

아랫 쪽으로 가면 강 옆으로 난 길을 걷게 된다.

 

갈랫길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어느 쪽으로 갈까.

선택을 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것이

바로 인간이다.

 

그것은 이미 에덴에서 시작되었다.

선악과를 먹어야 할 지

말아야 할지.

 

선택 만큼 괴로운 것이 삶에서 또 있을까.

 

그것은 자유이면서

구속이기도 하다.

 

강으로 난 길로 향했다.

물소리가 그리워서 였을 것이다.

 

 

 

 

 

 

 

강 옆엔 얇은 얼음이 얼었다.

아무리 추운 날씨가 계속되어도

강심까지 얼진 않는다.

큰 물이 흐르며 남긴 물 파장에

얼음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깊은 강은 소리 없이 흐른다.

더구나 겨울엔

소리를 삼키며 흐른다.

얼음 부서지는 소리에 홀연 적막감을 느꼈다.

 

작은 희망들이 모이면

큰 희망이 되고

그 큰 희망은

그 아무리 큰추위도

얼릴 수 없다.

 

아, 저 강물!

 

 

 

 

 

물이 다 증발해 버린 나뭇잎.

저들 몸에게도 물이 돌던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믈이 멈추고, 그리고-----

 

시간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강물은 말라 버린 나뭇잎,

그 옆에서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다.

 

 

 

얼음비가 내리고

눈빛도 회색빛으로 우중충하게 어둔 산길.

빨간 열매가 눈에 들어 왔다.

어둡던 마음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어둠 속에 등불 하나 본 것 같았다.

무명을 밝히는 등불.

 

벤자민 프랭클린일 것이다.

어둡기만 한 필라델피아의 자기 집 앞에

처음으로 등 불을 내 건 이가.

 

길을 가는 사람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등불을 밖에 걸자

이웃들도 따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필라델피아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가로등이 생긴 도시가 되었다.

 

등불 하나가 모여 가로등이 된다.

작은 개울물이 모여 강물이 된다.

 

나 비록 작은 실개울일지라도

모이면 강물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길이다.

낮은 곳으로 향하는 작은 마음으로

한 걸음을 떼는 일,

그것이 길을 가는 마음이고

그것이 길이다.

 

길을 걸으면

길이 내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그래서 나도 길이 된다.

 

돌아오는 길,

 

소리 없는 소리로

나를 부르며

따라 오는

강물 소리

 

돌아보면

나를 스쳐 앞서가는

바람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