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장(복부) 중심의 사람이야
"당신은 장(복부) 중심의 사람이야"
나는 애니어그램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런데 아내는 애니어그램에 대해 제법 깊은 이해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아내에게 나는 "당신은 장 중심의 사람"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사람의 성향이 누구에게 비난받을 일이 아니며,
더더구나 윤리적으로 옳고 그른 것이 아님에도
내가 장 중심의 사람이라는 아내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내 심사가 꽈배기처럼 꼬이는 걸 어쩔 수 없다.
장 중심의 사람은 너무 동물적이고 형이하학적인 것 같다는 나의 선입관 탓이다.
내가 평가하는 나는 머리 중심적인 사람이다.
장 중심의 사람보다는 더 고상하고 형이상학적이라는 고정관념이 그런 결론에 이르게 했을 것 같다.
참고로 아내는 자타공인 심장(마음) 중심의 사람이다.
힘의 중심은 에니어그램의 성격유형을 나누는 가장 기본적인 기준이다.
몸의 에너지가 어디를 중심으로 순환하는지에 따라 장(배) 중심, 가슴 중심, 머리 중심으로 나뉜다.
각 중심은 다시 3개의 유형으로 세분되어 9개의 기본유형을 이루게 된다.
학자에 따라서 힘의 중심은 3개의 자아라고 불리기도 한다.
대개 체격이 건장하고 투쟁적, 도전적인 인상을 준다.
주관심사는 환경에 대한 저항과 통제이며 그로 인해 독립성을 강하게 추구한다.
이들이 주로 느끼는 감정은 분노이다.
둥글둥글한 체격을 가지고 있으며 부드럽고 매력적인 미소가 특징이다.
주관심사는 자아 이미지와 인간관계이며 타인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기를 원한다.
이들이 주로 느끼는 감정은 수치심이다.
보통 허약하고 빈약한 인상을 주는 체격이 많다.
주관심사는 객관적 이치와 정보수집이며 안전을 추구한다.
이들이 주로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지난 금요일에 장인어른 댁에서 하루를 묵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Fort Lee에 있는 한남체인이라는 슈퍼마켓에 들렸다.
우연히 본 한국어 신문의 광고지에서 파가 네 단에 99 센트라는 세일 광고 때문이었다.
아내는 파를 화분에 심어서 오래 동안 키우며
필요할 때마다 얼마씩 잘라서 사용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야채가 파트에 열무와 풋배추가 그 싱싱한 몸짓으로 나를 유혹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열무 풋배추 비빔밥이다.
그것을 연상하는 순간 내 입에는 벌써 침이 한가득 고였다.
열무와 풋배추 대 여섯 단 사서 김치를 담그면
다음 주 내내 내 입은 천국의 열락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내에게 공손한 태도로 허락을 얻었다.
집에 돌아와서 아내는 오후에 열무 풋배추 김치를 담갔다.
나는 오가며 김치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아직 익지 않았음에도 그 기막힌 맛에 내 입은 진저리를 쳤다.
'당신은 장 중심의 사람'이라는 나에 대한 아내의 다소 모욕적인(?) 판정에도 불구하고
예쁘게 익어가는 열무 풋배추 앞에서
나는 자신이 장 중심의 사람이 틀림없음을 겸손되이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 전에 어제 하루 마지막으로 한 일이 풋배추 김치 한 조각을 먹은 일이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김치통을 열고 김치 한 조각을 아주 겸손하게 들어서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은 일이다.
평소 은은하게 떠오르게 해를 우아하게 바라보는 일을 생략해 버린 것이다.
내가 장 중심의 사람이라는 아내의 평가는 100% 확실한 것 같다.
그녀는 언제나 옳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