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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 Sadie의 그림

가을에 태어난 아이 2023. 11. 23. 19:28

손녀 Sadie의 그림

 

내가 즐겨 시청하는 한국 tv프로그램 중 하나가 '불후의 명곡'이다.

대중가요를 출연한 가수들이

자기의 색깔로 부르며 경연을 펼치는 프로그램인데

새로운 해석으로 다시 태어난 노래를 듣는 즐거움이 제법 크다.

이런 프로그램은 tv의 순기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난주 토요일에는 '불후의 명국 in USA'가 방송되었다.

한국가수들의 미국 공연이었는데

화면에 비치는 관객들을 보니

대충 한국인의 얼굴이 반, 그리고 현지인이 나머지 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k-pop의 영향 때문에

인기 있는 아이돌 그룹이 그 공연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접한

많은 현지인들이 관람 신청을 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노래는 물론이거니와 그룹 자체의 이름도 생소한

'ATEEZ'라는 아이돌 그룹이 출연할 때의

환호와 열광은 정말 뜨거웠다.

춤을 추며 뜨겁게 '떼창'을 하는 관객들을 보면

이미 한국 출신 관객들과 현지인 구분 없이 하나가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국제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아이돌 그룹은 그렇다 치더라도

처음 출연한 '잔나비'가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라는 노래를 부를 때

현지인이 따라 부르는 장면이 화면에 비쳤다.

외국인들에게는 비교적 생소한 그룹의 노래임에도

그것을 따라 부르는 현지인을 보면서

40여 년 전 처음 미국에 왔을 때와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격세지감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아내는 아이들에게 먹이는 음식을 할 때도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김치는 물론 김밥과 된장찌개도 주중에는 먹이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김치의 마늘과 김 냄새는 지독하게도 오래간다는 게

아내의 지론이다.

사실 미국 사람도 많이 먹는 치즈 냄새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지독하지만

아이들이 혹시라도 한국 음식 때문에 다른 아이들로부터

차별받을 것 같아서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웠는지 모른다,

 

학교 모임이나 가끔씩 콘서트에 갈 때에는

전 날부터 나도 아내도 마늘이 들어간 음식은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 아이들도

자기가 한국인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학교 생활이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위축되는 걸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10 년쯤 되었을까,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가끔씩 내가 일하던 세탁소에 오는 미국인 손님들 중에서

"김치 어디서 살 수 있어요?"

"좋은 한식당 가르쳐 주세요." 라며

한국어로 말을 건네는 젊은이들이 심심치 않게 늘어나게 되었다.

 

대한민국 문화의 힘이 세계적으로

위세를 떨치기 시작하면서

한국인과 한국 음식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은

젊은 세대부터 급격하게 달라지고 있다.

 

오래전에 내가 한국에 갈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던 셋째가

"아빠, 한국 가지 마."라며 한사코 내 팔을 잡아끌었던 적이 있었다.

한강의 다리 하나가 무너지며

많은 인명 피해가 났을 때였다.

그 소식을 어찌어찌해서 들었던 셋째의 눈에는

아빠가 태어난 나라가 위험하고 후진적으로 보였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즈음은 우리 아이들 모두 엄마 아빠가 태어나고 자란

대한민국에 대해 은근히 자부심을 갖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얼마 전에 미국의 한 슈퍼마켓에서 한국에서 수입한 김밥을 팔았는데

순식간에 동이 났다는 소식을 미국인 친구를 통해서 들었다.

우리 딸들도 담그지 않는 김치를

우리 딸들의 미국인 친구들은 집에서 만들어 먹는다고 한다.

오죽하면 우리 동네 달리기 클럽의 미리엄은

자기 친구와 수강료를 내면서까지

아내에게 김치 담그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할까.

 

미국에 처음 와서 움츠러들었던 가슴과 늘어졌던 어깨가

언제부터인지 펴졌다.

학기 첫날에 학교를 방문했던 큰딸이

손녀 Sadie가 학교에서 그린 그림을 사진 찍어 우리에게 보냈다.

마치 피카소의 그림같이 큐비즘의 기법으로 그려진 자화상 속에는

몇 가지 이미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태극기였다.

 

Sadie 엄마인 큰딸의 말을 들어보면

Sadie가 평소에도 한국을 좋아하며

한국에 가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한다고 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아이들이, 그리고 순주들이

내 아내와 나의 모국을 인정하고 사랑한다는 사실이

나는 그렇게 뿌듯하고 기쁠 수가 없다.

 

오늘은 Thanksgiving Day다.

우리 식구가 Sadie네 집에 모일 예정이다.

음식은 주문을 해서 식탁에 올릴 것이다.

예전엔 안내가 딸들의 도움을 받아 우리 집에서 Thanksgiving Day 음식을 마련했다.

그러나 우리가 콘도를 이사한 뒤부터 음식을 직접 하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말리는 데도 아내는 오늘 한국 음식 몇 가지를 준비해서

아이들과 나누어 먹을 것이라고 한다.

아내의 손을 거쳐 만들어지는 한국음식의 우수함이

Catering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 사이에서 단연 도드라질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감사한 Thanksgiving Day 아침이 밝아온다.

https://hakseonkim1561.tistory.com/30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