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백수생활 - 대타
슬기로운 백수생활 - 대타
내가 어제 내가 일하던 세탁소에 도착한 것은 10 시 45 분이었다.
지난 주 스위스 여행에서 돌아오던 날,
Chris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화요일에 시간을 내어 세탁소 일을 도와줄 수 있겠냐는 것이
메시지의 내용이었고,
배심원의 의무를 위해서 법원에 가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Chris는 나와 같이 근 30 년 동안
우리 세탁소에서 함께 일을 했고
지금은 그 세탁소의 주인이 되어
여덟 달 넘게 운영을 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Chris가 자리를 비우더라도
그의 아내와 딸이 충분히 빈자리를 메꿀 수 있으니
내 도움이 별로 필요할 것 같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래도 모처럼 하는 부탁이니 그러마고 승낙을 하고
어제 세탁소로 발길을 향한 것이다.
세탁소에 도착해서 온도계를 보니
오전임에도이미 섭씨 32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Ghris는 이미 법원으로 출발을 했고
그의 아내와 딸이 나를 웃음으로 맞아주었다.
날이 더워서인지
세탁소는 생각만큼 바쁘지 않았고
더욱이 내 도움이 필요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세탁소를 방문하는 단골손님들과 만나서 반갑게 인사를 했다.
손님들은 옛 친구를 대하듯 나를 반겼다.
그런데 한결같이 손님들은
나의 용모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60대에서 70대로 무게 추가 넘어간 내 용모가
뭐 그리 찬란하겠냐만은
그래도 밝고 건강한 모습을 보고
미국 사람들의 인색하지 않은 칭찬을 늘어놓은 것이었다.
더구나 한 여자 손님은 'radiant'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내 용모를 칭찬해서 내 가슴을 살짝 뛰게 했다.
용모에 대한 칭찬이 한 두 명이면 모르겠거니와
만난 사람의 수가 열이 넘는데 한결같이
미리 짜기나 한 것 같이 칭찬을 해주니
정말 내 용모가 빛이 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세탁소 거울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아무러면 어떻겠는가?
작년에 은퇴를 하고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사니
아무래도 구겨졌던 얼굴이 많이 펴졌을 것이다.
그리고 아침이나 저녁에 바닷가로 산책을 다니고,
듣고 싶은 음악을 듣고,
책도 읽으며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니
아마도 건강 상태가 많이 좋아졌을 것이다.
사실 일을 손에서 놓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였고
손주들 아이스크림이라도 넉넉히 사주려면
좀 더 일을 하고 싶은 미련도 있었지만
아내의 성화(?)에 힘입어 과감하게 은퇴를 했다.
그 은퇴가 물질적인 수입은 막았지만
내게 아름다운 용모를 선물해 준 것 같다.
하나를 손에서 놓고 나니
더 소중한 것이 내 손안에 담긴 것이다.
오후 세 시쯤 Chris가 법원에서 돌아왔다.
나는 다짜고짜 물었다.
현직 학교 선생님인 그의 아내와
올해 대학을 졸업한 딸이 있는데
왜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냐고.
Chris는 최근에 오후가 되면
정신없이 바빠서 내 도움이
꼭 필요한 것으로 판단해서 그랬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어제 내 도움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커다란 소득을 얻었다.
내가 일을 하지 않고 백수로 지내는 동안에
용모에 빛이 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열 명도 넘는 손님들을 통해 확인했으며,
Chris로부터는 세탁소 일에 대한 나의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자화자찬이 너무 심하다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수입 한 푼 없는 백수가
돈도 들지 않는 자랑 한 번 할 수 있는 소박한 권리를
누릴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섭씨로 거의 35도까지 수은주가 올라갔던 어제 오후,
우리 동네 전철에서 내리니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집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자꾸 콧노래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