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호박꽃이 피었습니다

가을에 태어난 아이 2023. 7. 11. 21:52

호박꽃이 피었습니다

스위스 여행을 다녀와서

내가 제일 처음 눈길을 준 것은 호박꽃이었다.

 

아내의 베란다 정원에는 장미와 패랭이, 제라늄이나 수국같이

자동적으로 내 눈길을 끄는 꽃들도 있고

자세히 보면 앙증맞기 그지없는 다육이 꽃들도 있음에도

굳이 내 눈의 점지를 받은 것이 바로 호박꽃이었다.

 

예로부터 호박꽃은 말 그대로 

미모가 그리 뛰어나지 못한 여자를 비유하는 데 사용되었다.

아니, 뛰어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무게추가 못생김 쪽으로 확 쏠린 여자의 용모를 표현할 때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쓰는 표현이 호박꽃이다.

 

베란다에 있는 아내의 정원에 호박꽃이

보란 듯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지난 5월부터였다.

 

아내와 나는 복숭아꽃을 보려고

뉴저지에 있는 '늘 푸른 농장'에 갔었는데

복숭아꽃은 보지도 못하고

빈 손으로 돌아오기가 허전해서

호박 모종을 모셔왔다.

 

아내는 내 아름들이 만한 화분에 호박 모종을 옮겨 심고

물과 양분을 아낌없이, 거기다가 사랑까지 

듬뿍듬뿍 주었더니

마침내 6 월 중순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기다리고 고대하는 호박이 열리지 않았다.

방울토마토 만한 애기 호박을 달고 나온 

호박꽃은 피었나 보다 하면

하루 이틀 지나서 이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나 호박꽃을 보러 베란다로 나가면

꽃 밑에 달고 나온 작은 호박이

바닥에 맥없이 툭툭 떨어지는 걸 바라봐야 하는데

그 광경이 몹시 실망스럽고 안타까워서

그 까닭을 아내에게 물어봤다.

 

"수꽃이 열려서 작은 호박을 달고 나온 암꽃에 수분이 되어야 하는데

수꽃이 피질 않아서 그래요."

 

수꽃과 암꽃이 어울려 피고 벌이나 나비가 와서

수꽃의 꽃가루를 암꽃의 꽃가루에 수분을 해주어야 하는데

그렇질 못해서 호박이 자라질 못한다는 게 아내의 설명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된장찌개 속의 호박도

오묘한 자연의 섭리가 작용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는 참 신기하고 경건한 느낌까지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집을 비운 사이 화분 속 호박밭(?)에 변화가 생겼다.

수꽃이 피어난 것이다.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한 암꽃들이

수두룩하게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는데

희망처럼 수꽃 너덧이 호박잎 사이로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벌과 나비가 우리 아파트가 있는 7층까지 오기가 불편해서인지

나비와 벌의 힘만으로는 수분이 안 되었는지

자라나는 호박은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붓으로 인공수분을 했고 그 결과,

드디어 우리 호박밭에 호박이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 다섯을 키웠고 손주들까지 본 나는

요즘 윤기 자르르 흐르는 호박을 매만지며

새삼 자연과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

 

지상에 피어나는 꽃은  

어떤 이유로든지 못생겼다고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몽실몽실  야무지게 자라는 호박이 열리는

호박꽃은 '호박꽃'으로 비하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베란다에 있는 호박밭으로 나가서

호박꽃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을 나직이 읊으며

호박꽃에 대한 내 사랑을 고백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