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일기 - 안개
어제는 하루 종일 안개에 싸여 지냈다.
특별한 스케줄 없이 하루 종일 집 안에서 시간을 껴안고 달래며 보냈다.
날씨가 웬만했으면 짧은 가을여행이라도 떠났겠지만
한낮에도 우리 집 베란다 담장 위에 놓인
화분 너머의 세상은 안개에 덮여 보이지 않았다.
우리 집은 말하자면 베란다 벽에 둘러 싸인 감옥이었던 셈이다.
아내는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짙은 안개가
이 글을 쓰는 오늘까지도 이어질 거라고 했다.
아침에 베란다로 나가는 문을 열었을 때
보이는 건 없었지만
바다에서 몰려오는 파도 소리는 평소보다 우렁찼다.
하루 종일 안갯속에 갇혀 있을 생각 때문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고 아내에게 제안을 했다.
"안갯속에서 데이트나 할까?"
별 것도 아닌 데이트 제안에 아내는 어릴 적 소풍을 가는 아이처럼 기뻐했다.
안개의 농도는 짙었다.
손으로 공기를 한 움큼 쥐면
주먹 사이로 물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머리에 묻은 안개가 얼마가 지내면
물방울이 되어 끊임없이 이슬처럼 흘러내렸다.
보드워크를 걸으며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어둔 바다의 해변 쪽은
흰 파도가 콘트라스트가 뚜렷했다.
흰 파도 위에는 검은 서핑복을 입은 서퍼들이
서핑을 즐기고 있었다.
안개 짙고 파도가 높아서
누군가에게는 악천후일 수도 있지만
어제 하루는
서퍼들에게는 서핑의 즐거움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흰 파도 위를 미끄러지다가
한 순간 검은 바다로 떨어지는 서퍼들을 보며
나는 음악 소리를 듣는 기분이 들었다.
해변의 꽤 긴 구간에서는
먼바다에서 펌프를 통해서
모래를 해변으로 옮기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모래로 이루어진 성과 성벽이 해변에 거대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호기심 많은 몇몇 사람들은
그런 광경을 전화기로 촬영을 하기도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환경 변화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Rockaway의
해변의 지형이 바뀌고 있음을 나도 진작 눈치는 채고 있었다.
어떤 지역의 해변은 점점 모래가 사라지고
바다가 육지 쪽으로 야금야금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것이
내 눈에도 보였다.
자연이 막연한 불안감을 내게 주었다면
사람들이 그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음은
제법 안심이 되는 대목이기도 했다.
누군가 위기를 감지하고
그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음은
나에게도 작은 울림을 남겼다.
댐의 작은 구멍이 생긴 것을 안 한 소년이
자기 주먹으로 그 구멍을 막았다는 이야기가 기억났다.
위기나 어려움을 마주쳤을 때 시선을 돌리지 말 것.
집에 돌아와서 샐러드와 달걀 프라이로 브런치를 먹었다.
이제부터는 하루에 두 끼를 먹을 것이다.
그리고 gym에 가서 근육 운동을 했다.
한 달 동안 쉬었던 운동을 다시 시작하려니
쉽지 않았다.
운동 기구의 무게가 이전보다 더 무거워진 것 같이
내 근육에 심한 저항을 했다.
무게도 줄이고 횟수도 줄여서 일단 시작을 했다.
운동을 마치고 나니 기분은 좋았다.
앞으로의 백수 생활에 운동은 필수이다.
gym에서 예전에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던
8층에 사는 영감님을 만났다.
음악을 틀어놓고 운동을 하는데
아령을 들고 벤치에 앉아서 가슴 운동을 하고 있었다.
운동을 마치고 떠나면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누군가 한국 사람 이름을 대는데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유명한 무술인이라는데 그 사람에게 무술을 배웠다며
나에게 슬로 모션으로 자기를 공격해 보라고 했다.
네가 팔로 그의 얼굴 쪽을 공격했는데
내 팔을 막는 그의 팔에서 어마어마한 파워가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 동작까지 이어서 하는데
나는 이미 기가 죽었다.
지난번에 엘리베이터에서 만났을 때
라켓볼을 치러 가는 길이라고 했던 그 노인은 자기가
여든다섯 살이라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나이를 밝혔다.
자기의 나이에 비해 아직도 팔팔함을 과시(?)하던
그 노인의 말이 허황되지 않음을 알았다.
그 노인과 다시 만나면 친구가 될 것이다.
오후에는 걸어서 2-3 분 거리에 있는
도서관에 다녀왔다.
도서관 안에는 노인들 대여섯 명이
신문이나 잡지를 읽고 있었고
더러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내가 도서관을 찾은 이유는 회원권 발급을 위해서였다.
뉴욕시 주민에게 무료로 발급되는 회원권이 있으면
메트로 폴리탄 뮤지엄을 비롯해 MOMA, 구겐하임 같은 곳의
전시물을 무료로 볼 수 있는 자격(Culture Pass)을 얻게 된다.
물론 1 년에 한 번 밖에 돌아오지 않는 기회이기는 하지만
30 여군 데나 되는 곳을 하루에 한 번씩 방문을 해도
1 년 중 한 달을 채울 수 있으니
백수가 된 나에게 시간도 보내고 문화생활도 할 수 있는 도서관 회원권은
내게 꿩과 알을 먹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정말 마음 부자가 되었던 어제 하루의 공은 아무래도 도서관 회원권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날이 어두워지고 저녁이 되니
날짜는 물론 요일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짐을 깨닫게 되었다.
손가락으로 꼽아서 비로소 요일과 날짜를 알아낼 수 있었다.
의식을 집중해야 비로소 요일과 날짜를 알 수 있었으니
백수 2 일차에 벌써 백수 생활에 완벽하진 않아도
슬슬 적응을 해가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일은 아틀랜틱 시티 가까운 곳에 살고 게시는
강선생님 부부를 찾아 뵐 예정이다.
78회 생신을 맞는 그 분과 함께 시간을 보낼 예정이다.
백수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런데 모레는 또 뭘 하지?
아직 아무 계획에도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
그리고 또 그 다음 날은?
내 백수의 생활에 언제나 안개가 걷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