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백수일기 - 아침에 커피 한 잔 했어요?

가을에 태어난 아이 2022. 10. 25. 20:26

백수일기 - 아침에 커피 한 잔 했어요?

 

"아침에 커피 한 잔 했어요?"

 

백수가 된 첫날

큰 아들과 테니스를 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내가 물었다.

내가 아들과 테니스를 치는 동안

아내는 프로스펙트 주변을 걷는다고

나를 따라 길을 나섰다.

 

그런 질문을 던진 아내의 의도가 궁금했다.

 

비가 살살 뿌리는 데다가

가을 정취가 묻어나는 거리 분위기가

아내의 마음을 살살 꼬드겨

집에 가는 길에 분위기 괜찮은 카페라도 들리자는 뜻인가?,

 

나의 속셈 법이 가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답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다

아내의 질문에 이실직고했다.

 

"물론 마셨지."

 

아침 기도는 걸러도

아침 커피는 따박따박 챙겨 마시는 게 내 삶의 법칙이고,

나는 그 법칙을 참으로 성실하고 경건하게 준수하는

모범 시민이다.

 

아침엔 내가 커피 마시는 걸 모를 리 없는 아내가

아침에 커피를 마셨냐는 질문을 할 때에는

필경 무슨 속셈이 있어서일 것이나

나는 그 속셈을 읽는 데 실패를 하고 말았다.

 

지난 일요일에는 커피 한 잔을 내려 마시고

두 잔 째 커피를 내릴 때,

아내는 "두 번째 커피를 마시는 거냐?"라고 정확히 짚을 정도로

집 안에서의 내 일거수일투족을 읽는 아내이다.

 

아내가 두 번째 커피를 내려 마시는 나에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물어보았을 것이나

나는 심적인 부담감을 느꼈다.

어디서 하루에 커피 두 잔 이상 마시면 나쁘다는

연구 결과를 접해서

사랑하는 남편의 건강을 위해 커피 잔 수를 헤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찌 되었든지 내가 두 번째 커피를 마실 때마다

얼마 전부터 조금씩 주눅이 들기 시작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어제부터는

두 번째 커피가 큰 의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집에 돌아와서 전혀 자연스럽지 않게

아내의 눈치를 보며

두 번째 커피를 내려 마셨다.

물론 아내에게도 한 잔을 상납(?)했다.

 

아내는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은 아침 일찍 일어나 글을 쓰면서

벌써 한 잔의 커피를 마셨고

두 번째 커피를 마셔야 하나 말아야 하며

아내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중이다.

 

:"몇 잔째 커피예요?"라는

혹시도 있을지 아내의 물음이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고

스스로 부끄럼과 두려움을 갖게 된 것처럼

나도 백수 주제에 커피를 두 잔씩이나

축내는 존재가 되었다는 죄의식이 생긴 걸까?

 

노동의 원죄에서 벗어나니

백수에게 주어지는 원죄 의식이 천천히 내 속에 자리 잡는 것 같다.

 

그러나 어쩌랴.

두 잔 째 커피가 이리도 당기는 걸.

초보 백수에겐

아직 배짱과 용기가 남아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두 번째 커피를 내리기 위해 조심스럽게

발을 뗀다.

 

안개 짙은 이 아침에.

 

사족

백수가 갖게 조는 원죄 의식은 순전히 나만의 기우이다

두 번 째 커피를 마실까 말까하는 동안

아내는 내게 와서 "커피 한 잔 더 마실래요?"한다.

백수의 원죄 의식은 말 그대로 나만의 것이다.

아내가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절대로 외부로붜 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돈이 없지 가오가 없는 것이 아닌

당당한 백수로 살 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