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은퇴하던 날 - 크리스 이야기, 그리고 나의 해방일지

가을에 태어난 아이 2022. 10. 25. 01:09

은퇴하던 날 - 크리스 이야기, 그리고 나의 해방일지

크리스는 내가 처음 세탁소 문을 열던 날

나와 함께 있었다.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1990년이다

세탁소 문을 연 것이 1990 년 8 월 1 일이었으니

그와의 인연도 세탁소 나이와 비슷하게 이어져 온 것이다.

 

옷가게가 있던 자리에 세탁소를 차리기 위해

바닥 공사를 했는데

그때 일을 맡아하던 보이즈라는 사람을 도와서

타일을 바닥에 붙이던 청년을 보게 된 것인데

그 것이 크리스와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꼼꼼하고 성하게 한 장 한 장 타일을 붙이는 모습에서

성실함이 묻어 나왔다.

 

그래서 내가 그에게 내가 세탁소를 시작하는데

도와줄 수 있겠냐고 물었고

크리스가 그러마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나와 함께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크리스는 트리니다에서 온 이민자였고

그 당시 이민 서류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불법체류자의 신분이었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사망 소식에 크리스는 멘붕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어머니의 장례를 위해 집에 갈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 당시 나도 내 코가 석자라 제대로 신경을 써주지 못했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위로의 말도 건네지 못했다.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을 나는 그저 말없이 지켜볼 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는 우리 세탁소를 5-6 년 동안 떠났다가

어느 날 다시 돌아왔다.

 

크리스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한동안 방황하다가

맨해튼의 어느 세탁소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는데

세탁소가 문을 닫는 바람에 주인에게 돈도 못 받고 실직자가 되었다.

 

그렇게 크리스와 나와의 인연은 다시 이어져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내가 비우게 된 자리를 대신 채우게 되었다.

 

그런데 토요일 11 시에 나타나야 할 크리스가

열 두시가 다 되었는데도 소식이 없었다.

전화를 해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마음이 불안해졌다.

 

한 번 경험했던 과거의 일이 생각나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고령의 아버지가 트리니다드에 계신데 아버지께 부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답답하고 불안했다.

아니면 새로운 자기 역할에 부담을 느껴서

공황장애가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렇게 속을 끓이며 안절부절하고 있는데

크리스가 나타났다.

오후 1 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내 몸의 긴장이 한순간 풀어졌다.

 

애써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왜 그리 연락도 없이 늦었냐?"라고.

 

차가 시동이 잘 걸리지 않아서 애를 먹었다는 

대답이 풀 죽은 목소리에 실려 돌아왔다.

 

마지막 날 이런 일이 일어나니

면목도 없고 숫기도 없는 크리스는 전화기를 꺼놓고

미안하고 송구한 마음으로부터 두어 시간 도망을 쳤던 것 같다.

 

이미 벌어진 일을 어찌할까.

 

나는 차근차근 내가 준비했던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알려주었다.

평소에 기회가 생기는 대로

주의사항을 알려주었기에 별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세탁소에서 맞은 마지막 날은 제법 바빴다.

코로나 시대가 시작된 이후 제일 바쁜 하루였고

제일 바쁜 한 주가 되었다.

 

다섯 시가 되니 우리 아이들이 깜짝 방문을 해서

나의 은퇴를 축하해 주었다.

크리스도 난크이나 세상에서 가장 숫기 없는 사람 중 하나이다.

 

그런데 갑자기 크리스가 불쑥 나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John(나)과  자기(Chris)는 그 긴 세월 동안 

허그 한 번 해 본 사이가 아닌데

오늘은 나의 은퇴를 축하하기 위해

허그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때로는 형 같고

때로는 아버지 같기도 한 나의 은퇴를 정말로 축하한다는 말을 하며

나와 포옹을 했다.

 

나와 크리스는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도

평소의 성향으로 보면 악수도 없이 헤어졌을 것인데

크리스의 돌발행동은 적잖이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허그를 하고 싶다는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큰 결심을 했을 것인지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크리스 때문에 답답하고 속을 끓였던

많은 기억들이 스르르 녹아 없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것은 반대로 크리스가 때로 내게 품을 수 있었던 서운하고 화나던 감정들이

녹아내리는 순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은퇴하는 날,

나는 노동의 원죄뿐 아니라

크리스와의 곤계 속에서 때로 느꼈던 답답함에서도

해방되었던 것이다.

 

나의 해방 일지는

크리스에 대한 축복으로 맺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