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은퇴하던 날 - 데브라와 웨딩 드레스

가을에 태어난 아이 2022. 10. 23. 17:29

은퇴하던 날 - 데브라와 웨딩드레스

 

세탁소 생활이 30 년이 넘었다.

정확하게 32 년 하고도 두 달을 넘긴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평소처럼 눈을 뜨고 은퇴의 날을 맞았다.

 

아무 느낌이 없었던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

너무 많은 느낌과 생각들이 겹치니

어느 특정한 느낌이 묽어진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1.

세탁소 문을 열고 얼마 되지 않아 

Chris에게 전화가 왔다.

크리스는 나랑 참 오랜 기간 우리 세탁소를 지켜온 친구이다.

금요일에 내가 퇴근 한 뒤에

젊은 여자가  나를 찾아왔다는 말로 시작은 했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크리스 말을 듣고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은

나를 찾아온 아가씨가 데브라라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내가 은퇴하는 날 그녀도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우리 세탁소 건너편에 위치한 교회에서

결혼할 예정이었던 그녀는 

주초에 웨딩드레스를 다려 달라고 우리 세탁소에  맡겼다.

이런 경우 정성을 다해서(내가 다린 건 아니지만) 서비스를 한다.

기도는 제대로 하지 않아도

이런 경우 기도하는 마음을 살짝 얹어서 한다.

 

그런데 그녀가 세탁소에 다시 들린 것은

찾아간 웨딩드레스에 무슨 문제가 생겨서는 아닐까 하는

불길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바로 길 건너 교회에서 결혼을 하니

웨딩드레스를 입은 자기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거의 다섯 시가 다 되었을 때

예복을 입은 신사가 세탁소에 나타났다.

자기가 신부 아버지라고 소개를 하는 그도

우리 세탁소 손님이었다.

신부의 아버지는 딸에게서 들었는지

곧 결혼식이 시작될 거라며 내게 알려주려고 왔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적잖이 당황을 했다.

 

데브라의 방문이

결혼식 초대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복장은 물론 마음의 준비도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복장도 그렇고 해서 아주 곤란한 표정을 짓는 나에게

신부의 아버지는 아무렴 어떠냐고 하며

오라는 말을 하며 황급히 세탁소를 떠났다.

 

어쩔 줄 모르고 있던 나에게

옆에서 보던 손님들과 크리스는

그래도 다녀오라고 내 등을 떠밀었다.

 

나는 서둘러 길을 건너 교회로 갔다.

내가 도착한 것은 신부 입장을 하기 직전이었다.

나는 데브라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고

아름답다는 말도 했다.

 

행복한 미소가 신부의  얼굴 가득 퍼졌다.

 

아마 나는 데브라를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

어제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하던 일을 그만두는 마지막 날이고,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날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나의 은퇴하는 날을 색깔로 그린다면

데브라가 입은 웨딩드레스의 흰 빛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