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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일기 - 자유로부터의 도피

가을에 태어난 아이 2022. 7. 4. 08:22

독신 일기 - 자유로부터의 도피

일요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세탁소 문을 열기에

내게 주어지는 자유로운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데 아내가 없는 날,

특별히 일요일은

24 시간이 

오롯이 나만을 위해 열린 상태로 도열해 있으니

그 출발선에서는 마음이 풍요로와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많은 시간의 나락을 까서

잘 도정을 하면

제법 영양가 있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그런데 오늘 아침 일어나서

평소처럼 운동을 하러 가려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 몸과 마음이

거미줄 같은 것으로 꽁꽁 묶인 것처럼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꼼짝할 수 없었다는 것은 핑계이고

운동을 포함한 그 어떤 일도 하고 싶다는

의욕의 심지가 타오르지 않는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사실 내가 아침마다 운동을 시작한 것도

아내가 등을 떠밀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내 자유 의지에 의해서였다.

 

단지 아내가 내 옆에 없다는 사실로

모든 무기력의 이유가 수렴된다는 것이

참으로 괴이하다.

 

아내가 없는 일요일이면 귀가 터질 때까지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싶었는데

정작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그 자유를 누릴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공연히 불안하고 집중이 되지 않는 나를 발견하고

이상하다는 생각을 넘어 내 자신에게 화가 날 지경이다.

 

그래서 오늘 하루는 밖에서 지내려고 마음을 먹었다.

 

아침에 동네 성당에서 미사를 하고

East Williamaberg로 갔다.

 

East Williamsberg는 워낙 공장들이 들어찬 곳이었는데

개발업자들이 빈 건물들을 주거지로 바꾸어서

10여 년 전부터 젊은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직도 그리 쾌적한 주거환경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맨해튼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지하철 역이 있으니 주머니가 가벼운 젊은이들에게는

나름 매력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공장의 벽과 문이

벽화로 채워지기 시작했는데

알음알음으로 이젠 제법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진 곳이기도 하다.

 

한 시간 반 정도 걸어 다녔다.

 

하늘이 찌뿌듯하고

공기에는 물기가 묻어 있어서

살갗이 끈적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종류의 날씨가 시작되었다.

 

하루를 걸어 다니겠다고

먹었던 마음을 바꾸었다.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Howard Beach에 있는 베이커리에 들렸다.

뭔가 달달한 것이 입에 끌렸기 때문이었다.

줄이 길었다.

그런데 아내가 사던 빵은 눈에 띄질 않았다.

빵 하나도 제대로 고를 줄 모른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냥 발길을 돌렸다.

 

집에 돌아와서

라면을 끓여서 밥 한 덩어리를 말아서 점심으로 먹었다.

일요일 점심은 라면이 딱이다.

 

점심을 먹고

동네 가게에 가서 맥주 두 캔과

감자 칩 한 봉지를 사다 먹었다.

오래간만에 마시는 맥주도 그리 상쾌하지 않았다.

 

나의  일요일 하루 동안의 자유 독신 생활은 

결론적으로 재미가 없었다는 말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저녁을 먹고

아내의 자식들(화초)에게

흠뻑 물을 주고 나니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옥상에 올라가 일몰을 보고 집에 돌아왔다.

 

에리히 프롬은 저서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자유도 누려본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

억압받던 사람들에게 갑자기 자유가 주어지면

사람들은 그 자유를 누릴 줄 몰라서

자유로부터 도피를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나도 그렇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자유보다는 

김여사의 김기사로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일인지를 깨달은

일요일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