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재
나는 천성적으로 소리에, 끌리는 성향이 있다.
늘 무언가를 듣지 않으면
타이어의 바람이 빠지고 있는 차를 타고 있는 것처럼
불안하고 허전한 느낌이 든다.
특별히 잘 때까지 책을 보던 나의 습관이
눈이 어두워지면서는
(음악) 소리를 듣는 것으로 바뀌었다.
더군다나 아름다운 음악이라면
더 말할 나위 없이
귀도 마음도 급경사로 그 소리에 끌리는 성향이 있다.
귀엽고 아름다운 목소리에
노래까지 잘하는 여자라면
일단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결혼하기 전까지 이런 여자들에게
마음이 기울어진 적도 있으나
숫기가 없어서 말 한 번 나누거나
가까이서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은 거의 없다.
나의 소리 집착증은 프로이트가 보면 어떻게 해석을 할까?
프로이트 식으로 말할 때
성 심리 발달 단계를
구강기와 항문기, 남근기로 나누어 설명을 했는데
소리를 듣는 귀에 고착되어 있는
나는 어떤 설명을 해야 가능할까?
나름대로 분석을 하자면
어린 시절 헤어진
어머니의 목소리를 그리워하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예쁘다',
'사랑한다'
그런 소리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는 것이 아닐까?
아마 그럴 것이다.
아내는 따지고 보면 내겐 어머니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내 귀에 늘 '사랑스럽다'라고 속삭이니까.
그것도 예쁜 목소리로 말이다.
내가 군대 생활할 때 아내는 동생들과 함께
원통까지 나를 만나러 와서
원통 검문소에서 천도리에 있는 장교 숙소로 전화를 했다.
일요일 아침 단 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숙소 당번 병이 건네주는 수화기에서
아내 목소리는 맑은 샘물이 되어
마구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아내는 그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다.
내가 미국에 와서 한 달치 급여를 모아
처음으로 산 것도 마란쯔 전축이었다.
지금은 다 망가져서 버리고 없지만
(그만 버리라는 명을 거역하고)
앰프만은 아내 몰래 간직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그립고 절실했던 소리에 대한 추억 때문이다.
아이들이 어리고 세탁소가 한창 바쁠 때
소리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나는
친하게 지내던 음향 가게 주인으로부터 제안을 하나 받았다.
누가 이사를 가는데
스피커 한 쌍이 너무 부피가 커서
급하게 팔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와서 소리나 한 번 들어보라는 것이었다.
참나무로 된 외관에 뒤 쪽에 나팔관 같은 것이 있어서
외양으로 보아도 썩 괜찮은 물건(?)처럼 보였는데
높이가 거의 내 가슴까지 올라오는 우량아처럼 듬직했다.
집도 큰 데 공간을 채우는 데는
이 스피커가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 허영기(?)가 발동했다.
배우지 못 한 사람이
벽 면 한쪽 책장을
읽지도 못하는 외국 서적으로
도배를 하는 셈 치면 될까?
가끔씩 집에 혼자 있을 때
Fisher 250 앰프와 연결된
Klipsch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그때는 너무나 바빠서
그 스피커로 음악을 들을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건 삶의 아이러니였다.
스피커를 살 경제적인 여유는 있었으나
소리를 들을 시간적인 여유는 없다는 사실은
오류 투성이인 내 삶의 한 단면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올 초에 집을 세 주고
좁은 브루클린 아파트로 이사를 할 때도
거의 모든 가구를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지만
(그중엔 꽤 괜찮은 보스 스피커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른 오디오 기기와 함께 덩치 큰 이 스피커만은 포기하지 않고 가지고 왔다.
벽이 날아갈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앰프의 볼륨은 1/4 이상을 올려 본 적이 없다.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어머니의 속삭임 같은 느낌까지 재생이 된다는 점에서
물리적인 소리뿐 아니라
감성적인 소리까지 들려주는 이 스피커로 해서
내 삶이 얼마나 윤기가 흐르는지 모르겠다.
내 맘의 위로가 되는 이 스피커가 하도 기특해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보았더니
스피커 하나가 1 달러 빠지는 6 천 달러다.
한 쌍을 새로 장만하려면 만 2 천 달러에 세금을 합치면
만 3 천 달러가 훌쩍 넘는다.
물론 쓰던 것이기 해도
한 쌍에 2 천 500 달러에 구입을 했으니
이건 횡재도 보통 횡재를 한 것이 아니다.
아이들 어릴 적,
세탁소는 너무 바빠서 점심 식사도
알아서 할 시간이 없었다.
너무 바빠서 돈 쓸 일이 별로 없었던 시절에 사 두었던
스피커가 요즈음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여유 시간이 생기면 아이들 뒷바라지할 일이 없어진 요즘
스피커 한 쌍이 주는 행복에 폭 빠져 있다.
지금이라면 경제적 이유 때문이라도
만 이 천 달라는커녕
이 천오백 달러도 버거워
이런 스피커 한 쌍은 언감생심, 마음조차 둘 수 없을 것이다.
20 년도 더 지난 세월,
생각 없이 단순히 허영기로 스피커에 투자했던
2 천 5 백 달러가 요즘 엄청난 감성적 이득으로
내게 돌아오고 있다.
내게는 횡재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었는데
이젠 그 믿음이 근본부터 흔들린다.
'타타타'라는 노래의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라는 가사처럼
알 몸으로 태어나서 어디 옷 한 벌뿐일까?
물질적인 재화는 그렇다 쳐도
어릴 적 내가 잃었다고 생각했던
그 위로와 사랑의 속삭임을 요즈음 내게 들려주는
아내와 아이들, 친구와 이웃들----
내가 이승에 태어난 것 자체가
'수지맞는 장사'라는 생각을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되새김질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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