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지우기
시간 지우기
1.
일요일 아침, 미사를 마치고
아내와 함께 High Land Park로 향했다.
새 집으로 이사하기 전에
꼭 필요한 짐이 아니면 모두 남들에게 나누어 주거나
버리기로 했는데
그중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썼던 편지와 일기장 같은 것을 태우기 위해서였다.
공원의 바베큐 그릴에
편지와 일기장 모두를 태웠다.
내가 보병학교 교육을 마치고
배치를 받은 곳이 보병 제12 사단 51 연대였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
언제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몰라도 위의 구절은
정확하게 내게 해당되는 종류의 것이었다.
나는 강원도 원통에서도
툴툴 거리는 시외버스를 타고 30 분 이상
북쪽으로 가야하는 천도리라는 곳과
철책선에서 24 개월의 군대생활을 했다.
둘러보면 온통 산이고
그 사이로 물이 흘렀다.
문병의 혜택이란 거의 없는 곳에서 24 개월을 살아낸다는 것은
스물 너덧 살 푸르른 청춘에게는 천형과도 같았다.
그런데 그 곳에서의 삶이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은
8할 이상이 아내가 보내주는 편지 덕이었다.
분홍색 편지 봉투에 예쁜 글씨로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적은 편지는
진실로 척박한 땅에서 내 삶을 이어가게 하는 물줄기가 되게 해 주었다.
그 편지를 아내는 하루도 거른 날이 없었다.
철책선에 있을 때에는
2 주치 편지가 한꺼번에 배달된 일도 있었다.
아내의 편지는
그야말로 나를 그녀에게 중독이 되게 한 마약과도 같았다.
2.
결혼해서 살면서는 편지 쓸 일이 별로 없었는데
ME 주말을 다녀온 뒤
발표 팀으로 봉사하면서
우리는 매일 서로에게 '사랑의 편지'를 쓴 적이 있는데
하루도 거르지 않고 1500 일을 넘겼다.
아내와 나의 노트북을 합치면
스무 권이 넘었다.
3.
편지가 천여 통,
노트 북 스무 권이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 글자의 길이를 이으면 얼마나 될까?
그 글자들을 적기 위해 보낸 시간들을 모으면
또 얼마나 될런지.
종이 위에 쓴 시간들은 사라졌지만
그 기억들은 아직도 우리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다.
서로를 향한 그 길고도
끊어지지 않고 흐르는 마음의 강물.
그 강물이 이젠 글자로 적지 않아도
관성으로 흐른다.
4.
젊은 시절 시라는 걸 끄적거릴 때가 있었다.
시라기 보다는 낙서의 수준이었다.
어느 날 노트에 끄적거린 한 줄.
'숯불 같은 사랑'
활활 타던 불길이 잦아드니
연기도 사라지고 빨갛고 은은한 불만 남았다.
그을음 없이 곱고 뜨거운 사랑만이
남은 것일까?
가을이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