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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손가락,그리고 길 가의 돌(2016)

가을에 태어난 아이 2019. 1. 17. 21:56

나의 손, 손가락 그리고 길 가의 돌 (2016)

 

나는 손재주가 없는 사람입니다.

 

손으로 무얼 하는 게 영 불안하고 어색합니다.

우리 나이 또래 사람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연필을 썼습니다.

나중에 샤프펜슬이라는 것이 나와서 연필을 깎지 않아도 되는

편리한 시대가 오긴 했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연필은 하나하나 손으로 깎아서 써야 했습니다.

 

그때는 연필뿐 아니라 거의 모든 ()국산 물건들의

품질이 형편없을 때였습니다.

문방구도 예외는 아니어서 

연필 심이 힘이 없어 잘 부러지고

깎기도 전에 이미 심이 곯은 것도 있어서 

학교에서 짬짬이 연필을 깎아야 할 일이 자주 생겼습니다.

그 때마다 누군가에게 부탁을 해야 했습니다.

 

어릴 적에 샤프펜슬이 내게 주어 졌다면

나는 정말 공부를 잘했을 거라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연필 나빠서 공부 못 했다'는 우스개 소리는

나를 위한 맞춤형 변명입니다.

 

'개발 새발'

글씨를 못 쓰는 걸 이르는 표현입니다.

물론 내가 이 범주에 포함됩니다.

글씨가 개발 쇠 발 이니 그림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학교 때 여학생들이 '가사'를 배울 때

남학생들은 '제도같은 걸 배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무슨 설계도 같은 걸 오밀조밀아주 세밀하게 그려내는 과목이었는데

그걸 할 때마다 '가엾으신 어머니 왜 나를 나으셨나요?'라는 가사가 들어간

맹인 가수 이용복의 노래가 떠 오르곤 했습니다.

 

18" (인치)

머리부터 심장까지의 거리입니다.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긴 거리이기도 합니다.

머리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떠 올라

그걸 베풀고 나누는

손까지 도달하는 거리가 길다는 말입니다.

 

거리그 시간.

 

나는 손재주가 없을 뿐 아니라

머리에 있는 사랑을 실천하는

손재주도 없는 사람입니다.

 

내 자화상을 그리자면

아마 'ET' 같은 형상일 것입니다.

머리는 크고 작은 손과 팔이 달린 팔다리를 가진 기형적인 그런 모습.

 

손재주는 없어도

어릴 적 손이 예쁘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습니다.

 

"남자 손이 왜 이렇게 예뻐?"

 

이런 말을 들으면 배시시 입 꼬리가

오르락내리락했습니다.

 

잘할 줄 아는 것이 없이 예쁘기만 한 손도

세월이 흐르다 보니

거칠어지고 볼 품도 없어졌습니다.

 

이젠 정말 내 손에는 어떤 찬사도 

선뜻 내어줄 수도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손재주는 나아질 기미가 고양이 터럭만큼도 없고

미모까지 빛을 잃으니

이젠 더 이상 내 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무의미할뿐더러 두려운 때가 되었습니다.

 

내 손에서 맛을 앗아간 것은 비단 굵어진 손가락 마디뿐만이 아닙니다

특별히 두 번째 손가락은

안 쪽으로 20도가량

오른쪽과 왼쪽 검지를 맞대면

그 빈 공간이 길쭉하고 야윈 하트 모양을 만들 정도입니다.

 

검지또는 인지라 부르는

두 번째 손가락이 그리 휜 것은

벌써 26 년째 하고 있는 세탁소 일 때문입니다.

 

세탁과 다림질이 끝난 옷을

옷걸이에 걸고 포장을 해서

컨베이어에 걸었다가 손님에게 찾아주는 게

내가 세탁소에서 하는 일인데

일주일에 천 벌이 넘는 옷의 무게가

내 손특별히 두 번째 손가락에 얹히기 때문입니다.

 

손재주는 없어도 예쁘던 손의 전성시대는 

26년 동안 서서히 저물어 갔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휜 손가락 때문에

우리 아이들 다섯,

모두 반듯하게 잘 자라서 

제 자리제 갈길 찾아서 떠났습니다.

벌써 딸 둘은 결혼을 해서

손주가 둘이나 됩니다.

 

 

정종수 시인의 길가의 돌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내 죽어하느님 앞에 설때

여기 세상에서 한일이 무엇이냐

한 사람. 한 사람. 붙들고 물으시면

 

나는   끝줄에 설 거야.

차례가 오면 나는 슬그머니 다시

끝줄로 돌아가 설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세상에서

한일이 없어

끝줄로 가서 있다가

 

어쩔 수없이 마지막 차례가 오면

나는 울면서 말할 거야

정말 한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무엇인가 한일을 생각해 보시라면

마지못해 울면서 대답할 거야

 

길가의 돌하나 주어

신작로 끝에 옮겨 놓은것 밖에

한일이 없습니다...

 

 

나중에 내가 죽어서 하느님 앞에 섰을 때

내가 세상에서 한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면

자꾸자꾸 뒤로 내 빼다가

할 수 없이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슬그머니 손재주 없는 내 손,

더 이상 예쁘지도 않은 손, 그래서 등 뒤로 감춘 손,

그중에서도 둘째 손가락을 

쭈뼛쭈뼛 마지못해 내어 놓을 것입니다.

 

길 가의 돌 하나 제대로 치운 적이 없는 손, 

그리고 손가락 밖엔 정말 내어 놓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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