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ke father, like SON
Like father like SON
영어에 ‘Like Father like son’이라는 표현이 있다.
한국말로 옮기자면 ‘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이 아주 꼭 들어맞는다.
아버지와 아들이 용모며 행동거지가 아주 닮았음을 설명하는 말이다.
그 닮음의 상태가 남들이 보아서 부정적이고 마뜩찮을 때는
‘그 아비에 그 자식 ’으로 살짝 등급이 하향 조종되어 쓰이기도 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마음으로 아름답고 향기롭게 잘 살면 사람들은
‘역시’라는 말을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앞에 덧붙여 칭찬을 대신하곤 한다
우리 큰 아들 준기와 나는 과연 어떻게 불려질 지 자못 궁금하다.
사실 준기와 나는 여러 면에서 닮은 점이 많다.
먼저 수려한 용모(?)가 같다면 같을 수 있겠다.
준기는 남자로 태어났지만 생긴 건 여자보다 더 곱상했다.
학교 다니면서도 잘 생긴 것으로 동급생을 넘어서 선후배 사이에서도 명성이 자자했다.
그런 사실은 여러 루트를 통해 내 귀에 들려왔다.
준기보다 나이가 위인 누나들이며 어린 사촌들을 통해서
그 사실을 확인한 것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아내는 나와 결혼할 때 학벌이나 재산 같은 건 전혀 보질 않고
오직 얼굴 하나 보았다는 말을 가끔씩 농담처럼 하곤 하는데,
그것이 농담으로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대학 시절 아내의 친구들도 나를 보고는
‘목욕탕에서 갓나온 남자’같다는 말을 했다는 객관적 사실로 증명될 수 있을 것 같다.
(참고로 아내는 눈이 아주 높은 편이다.)
물론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얼굴도 많이 구겨지고
머리엔 서리가 내린 데다가
주변머리(?)까지 업어진 마당에 현재의 모습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믿어달라고 강변하기가 어렵긴 하다,
그래도 대학 입학시험 서류에 첨부하기 위해 찍었던 증명 사진이나
청년 장교 시절의 사진 속의
푸르른 내 모습을 보면서 가끔씩 나르시스트가 되곤 하니
내 아들의 나이로 되돌아가면 아들의 용모에 그리 뒤떨어지지 않을 것 같다.
(증거 자료로 제출할 준비도 되어 있다.)
용모로만 보면 우리 부자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해도
그리 큰 과장이 아니라 우길 수 있지만,
우리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있으니
불어버린 수제비처럼 끈기나 찰진 맛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준기가 대학에 가기 몇 년을 나와 함께 우리 집 정원 관리를 한 적이 있다.
정원 관리라는 거창한 이름을 쓰기는 했지만 사실은 잔디를 깎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막내 아들은 끝까지 남아 일을 돕는데 비해서
준기는 조금 하다가는 슬그머니 사라져 자전거를 타거나 딴 짓을 하곤 했다.
그런 건 공부를 하는 태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공부는 뒷전이고 친구들과 노는 일이 우선이었다.
나는 공부 대신에 공상을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은 나와 준기가 아주 근사치에 가깝긴 하지만 결과물은 아주 다르다.
공상으로 시간을 보내던 내게 지금 내게 남은 것은
그야말로 공상 밖엔 없지만
준기에겐 인생을 어깨동무 하며 함께 가는 귀한 친구들이 남아 있다.
준기는 친구들을 위해 희생을 아끼지 아니 한다.
그 바쁜 Law School 첫 학기 중에도 친구 하나가
인기 있는 유명 TV 방송 중 하나인 ‘Saturday Night Live Show’라는 프로그램의
고정 코미디언으로 일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주말에 뉴욕으로 와서 축하를 할 정도이니 더 말 해 무엇 하겠는가?
그러니 내 일보다 친구 일이 먼저인 준기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뭔가를 이루리라는 기대는 전혀 하지 않고 살았다.
준기의 성적표는 초등학교부터 대학을 졸엄할 때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면 누가 믿을까?
적어도 준기가 George Town Law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런 준기가 풀기 없이 헐렁하기만 했던 우리 공동의 삶의 노선을 달리하는 일이 생겼다.
대학 다니며 틈틈이 워싱톤의 빈민가로 봉사활동을 다니곤 했는데,
그 사람들의 희망 없음을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정치를 하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법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방학 때면 연방 하원의원과 상원 의원의 사무실에서 인턴을 하면서 꿈을 키우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꿈을 갖게 된 준기는 그 때부터 정말로 공부라는 걸 하기 시작했고,
대학을 졸업하고 3년 동안 직장 생활을 하고는
작년 가을 학기부터는 자기가 가고 싶었던 George Town Law에서
꿈을 향한 비상을 시작했다.
처음 입학할 때는 입학생들이 거의 다 명문 대학 출신이라는 사실에 위축이 되긴 했어도
자기 페이스 대로 성실히 첫 학기를 마쳤다.
마지막 시험을 보고는 “적어도 절반”은 한 것 같다고 전화를 했다.
나는 반신반의 했다.
반만 해도 성공이기 때문이다.
이 학교 출신은 10등 중 6등 안에만 들면 좋은 직장에 취직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엊그제 다시 준기에게 전화가 왔다.
“Guess What?”하며
제법 들 떠 있는 목소리가 전화기 저 편에서 들려왔다.
순간 좋은 소식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우리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니 말이다.
준기가 전한 소식은 전 과목 성적이A라는 것이었다.
상위 10% 안에 드는 성적이라는 거였다.
정말 믿어지질 않았다.
자기도 믿어지질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인 나에게 “더 이상 걱정하지 말라”는
배려의 말을 잊지 않았다.
그런 아들이 기특하고 대견스러움을 넘어서 존경스러웠다.
그래서 아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Like a father like a SON’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이지만
아버지는 소문자로 아들은 대문자로 썼다.
아들이 아버지보다 낫다는 존경의 뜻을 담아 그리 썼던 것이다.
이젠 아버지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훌륭한 모습으로 자기의 꿈을 향해 비상하는 아들을 생각할 때마다
더 작고 초라해지는 나를 보게 된다.
'그 애비에 그 아드님'의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시도 때도 없이 입 꼬리를 비집고 배시시 터지는
이 주책 없는 웃음을 참기 힘드니
아 어쩌면 좋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