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득 신부님 선종.
박 신부님이 선종하셨다는 소식이 들렸다.
어제 (9월 18일 ) 오후 4 시 40 분 쯤이라고 했다.
박신부님은 아에게는 영적인 아버지 같으신 분이다.
ME 발표 부부로서 첫 주말을 박신부님과 했다.
주말 내내 그 포근하고 행복했던 기분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솥뚜껑 같은 믄 손으로 내 손을 잡아주셨던 기억.
내 손을 잡으셨지만 내 영혼이 그 분 안에서 쉬는 것 같이 안락하고 평화로왔다.
20년도 더 전에 박신부님께 고백성사를 보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그 분을 통해 느꼈기에
박신부님은 하느님과 나 사이를 연결해주는 특별한 존재로 늘 생각했다.
이젠 하느님의 품에 안겨
내가 그랬던 것처럼 평화롭게 쉬셨으면 좋겠다.
공인이라 늘 신부님이라고 불렀지만
마음 속으로는 아버지라고 불렀던 신부님
오늘은 그냥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 곁에 계신는 동안 아버지 때문에
참 많이 행복했어요."
가슴으로 지은 (새)집 - 박창득 신부님
어제 점심을 먹고
집을 나선 것이
오후 두 시 경이었을 것이다.
아침부터 제법 짙은 회색 빛이 도는구름이
돌멩이 하나 집어 던지면
닿을 것 같은 곳까지 내려와
낮게 드리우고 있었다.
아침에 축구를 다녀와서
일요일 오전을 음악을 들으며 보냈다.
몸을 소파에 깊숙하게 가라 앉히고
귀와 영혼은 음악 속에 푹 빠졌다.
짧긴 해도 자유로운 여유 시간을
음악과 함께 보낼 수 있음이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
나이 드는 것도 행복한 일임을
온 몸으로 느끼며 사는 요즈음이다.
하기야 몇 해전 까지도
미국에 이민 와서 여유 없이 빡빡한 삶을 살았다.
쉬는 날도 없이 일을 해야 했던
내 이십 대 후반,
그리고 삽십 대를
말 그대로
질풍노도처럼 앞만 보고 내달렸다.
바쁘고 정신 없는 것은
사십 대가 되어서도 마찬가지 였다.
먹고 사는 일 뿐만 아니라
다섯 아이들 뒷치닥 꺼리는
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 긴 세월 동안
일 분 일 초를 다투며 참 빠듯하게 살아왔다.
아이들이 다 집을 떠나고 난 요즘
비로소 내가 집에 남아 나만을 바라보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에만 열중해도
아무도 무어라 할 사람이 없으니
여간 홀가분하고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그렇게 일요일 오전 내내
음악 속에 푹 빠져 있다가
아내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점심 시간이 된 것이었다.
무어라고 표현해야 하나,
부족한 것 하나 없는
그 포만의 시간을 빠져나와야 하는 안타까움을.
묵은 김치를 숭숭 썰어 넣고
밀가루 반죽을 뚝뚝 투박하게 떼어
끓인 얼큰한 수제비는
흐리고 우중충한 날씨 때문에
자칫 기분마저 푹 가라앉기 십상인
일요일 점심 메뉴로는 더 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목덜미에 땀이 송송 돋을 정도로
열심히 그리고 정성을 다 해
수제비 한 그릇을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비웠다.
음악이 주는 포만감보다도
더 큰 만족감이 몰려 왔다.
창 밖의 흐린 하늘도 환히 밝아지는 듯 했다.
아내가 말했다.
"점심 먹고 박 신부님 뵈러 가요."
그러고 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얼마 전 박신부님이
크게 다치셨다는 소식을 들었어도
그녕 귓전으로 흘렸다.
막연하게 '시간이 나면 찾아 뵈어야지'하는,
의지가 결여된 생각만이
박 신부님의 부상 소식에 대한 내 반응의 전부였다.
아내의 제안은 그렇게 깊고 어두운 곳으로 묻고 잊으려던
내 무성의에 대한 질책처럼 들렸다.
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아내는 늘 내 부족한 면을 채우주고 메꿔주는
역할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아내는 나의 반쪽일 뿐 아니라
나의 더 '나은 반 쪽'(better half)이다.
아니 나의 전부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눈이 곧 흩날릴 것 같은 날씨였다.
집을 나서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잎이 다 떨어지고
가지만 남은 키 큰 나무들 곳곳에
새 집들이 을씨년스런 모습으로
깃들어 있었다.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차를 달려
한 시간이 좀 못 걸려 도착한 곳은
뉴 저지의 Milburn 부근의
한 재활 요양원이 었는데
길 맞은 편의 골프장 만큼이나 넓은 대지 위에
여유로운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3층에 있는 박신부님의 병실로 오르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왼 쪽으로 도니
테이블과 의지가 놓여 있는
넓은 홀이 있었고
그 뒤로는 밖이 훤하게 보이는
통유리를 통해서
파킹장이며 그 뒤의 나무들,
그리고 더 먼 곳의 경치도 시야에 들어 왔다.
박신부님의 병실을 찾는 노력을 할 새도 없이
한 테이블에 모여 있던 십여 분의 한국 사람들이
우리를 손짓 해 불렀다.
"여기예요."
그 분들은 우리가 차에서 내리는 것부터
걸어오는 모습까지
통유리를 통해 훤히 보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박 신부님이 앉아계신 휠체어의 방향을 틀어
우리를 향하게 해주었다.
두 팔에 기브스를 하고 계셔서
손을 쓰실 수 없는 박신부님의 손을 본 것은
시간이 조금 흘러 손을 내미시는
박신부님의 손을 잡을 때가 되어서였다.
신부님의 얼굴을 보았는데
두 눈 주변에 푸른 멍이 들어 있어서
마치 팬더 곰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얼굴 한 쪽은 넘어지면서 긁힌 상처에
새 살이 돋았는데 아직 아물지 않아
여린 분홍빛을 띄고 있었다.
그 분홍빛이 내 감각기관에
전기가 오르는 것 같이 찌릿한 아픔을
전달해 주었다.
앞으로 분홍빛을 볼 때면
가슴이 아릴 것 같다.
표정도 별 변화가 없으셨다.
우리 부부를 보시면
늘 사람 좋은 웃음을 넉넉히 주셨었는데-------
내가 오전에 누리던
나이 들어감의 여유와 행복이
누군가에게는 고통이 될 수도 있음을
신부님을 뵈면서
아프게 깨달았다.
두 팔엔 기브스를 하셨는데
겨우 손가락 두 마디만
밖으로 나와 아주 부족하기 짝이 없는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기브스 위에는 먼저 다녀간 사람들이
신부님의 회복을 비는
사랑의 멧세지를 적어 놓았다.
사람들의 희망처럼
회복하실 수만 있다면-----
그러나 희망이란 것이 현실에서는
드라마와는 달라서
때로는
사람들의 염원과는
너무 먼 곳에 있다는 사실을
잠시 후에 알게 되었다.
머리를 다치신 신부님이
예전과는 너무 달라지셨음을.
자기 한 몸 제대로 건사할 수도 없는
늙은 사제의 손.
아마 신부님은 당신의 아픔 보다는
그 손으로 나누어줄 수 없는
사랑 때문에
더 아파하고 계실런지도 모를 일이다.
신부님이 이 미국에서 40년 동안
한인들을 위해 하신 일이 얼마나 되는지
나로서는 가늠할 수가 없다.
내가 알고 들은 것이야
커다란 모자이크의 한 조각일 뿐이기 때문이다.
신부님은 적어도 나에게는
영적인 아버지이시다.
내가 하느님을 체험하고 보여주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 신비하고도 오묘한 경험이 든 보따리의 매듭을
언젠가는 풀 기회가 올 것이다.
그 분의 손은 두꺼비 손이다.
크고 두껍다.
내 손은 늘 그 분의 손 안에 잠길 뿐이다.
그 분의 손을 잡을 때
나를 감싸 쥐는 하느님의 손을 느끼곤 했다.
ME(Marriage, Enconter) 발표 부부로서
첫 주말을 할 때
신부님과 함께 발표를 했던 기억은
지금도 꺼내 보면
늘 따스하고 행복한 시간이 솔솔 배어나오는
오래 된사진첩과도 같다.
보고 또 보아도 질리지 않는
그런-----
우리가 신부님을 뵌 지 5분이 채 되질 않아서
먼저 오셨던 분들이 창 밖을 보면서
'꽃동네 수녀님들이 오시네."
하고 나지막히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뒤에 수녀님 두 분이
할머니 두 분과 할아버지 한 분을 모시고
오셨다.
꽃동네는 한국의 꽃동네의 미 동부의
지원 같은 곳이다.
수녀님 몇 분이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을 모시고 살아가는 공동체다.
그 분들에게도
박 신부님은 특별한 존재였을 것이다.
마치 내가 갖지 못한 모자이크의 다른 한 조각을
가지고 계실 것임에 틀림 없었다.
특히 세 노인들에게 박신부님은
집 같은 존재일 것이다.
갈 곳이 없는 그 분들, 그 공동체가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는데
박 신부님은
어떤 역할을 하셨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신부님께서 한 평생
하나씩 만들어 벽에 붙힌,
내가 알지도 못하는
모자이크 조각은 얼마나 될까?
우리는 모르고 갔지만
박 신부님의 아들격인 야고보 신부님이
박신부님을 위한
미사를 드리신다는 소리를 그 분들이
오실 때 들을 수 있었다.
우연히 신부님을 뵈러 가긴 했지만
신부님을 위한 미사까지 드릴 수 있음은
아팠던 마음에 작은 위로가 되었다.
미사가 시작되면서
창 밖엔 희끗희끗 새치처럼
눈이 흩날리기 시작하더니
미사가 끝났을 땐
흰 빛이 제법 누리를 덮을 정도가 되었다.
위로부터 내리는 흰 빛의 위로,
혹은 축복.
그 눈이 신부님께도 위로가 되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아내는 집을 나서기 전에 밥을 해서
누룽지를 만들었다.
언젠가 신부님께서 누룽지 끓인 것을
만나게 잡수셨던 기억을 되살려
누룽지와 함께 뜨거운 물을 담아 가지고 갔다.
신부님은 기도가 막힐까봐
물도 조심해서 마신다는
주변 분의 말을 듣고는
그냥 가지고 돌아왔다.
신부님을 위한 누룽지는
기약 없이 뒷 날로 미루어 놓아야 했다.
살아 계시는 동안
누룽지를 대접할 날이 다시 올 까------
그랬으면 좋겠다.
눈 길을 거슬러 집에 돌아왔다.
우리 동네엔 눈이 그다지 많이 내리지 않았다.
어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낮에 보았던
새 집들의 윤곽이
흐릿하게 보였다.
신부님은 사제의 삶을 사시는 동안
큰 집을 여러 채 지으셨다.
많은 영혼이 깃들어 사는-----
나뭇잎에 가려진 새 집들처럼
사람들 눈에 띄지는 않아도
그 위로와 희망의 집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크게 크게
증축을 계속하고 있었다.
언제가 될 지는 모르지만
신부님 삶의 겨울이 깊어
육신의 잎들을 벗는 순간
그 집들의 모습이 비로소 나타날 것이다.
어느 시인의 시에서처럼
신부님은 새들처럼
가슴으로 집을 지으셨을 것이다.
가지에 찔리며
여기저기 피도 나고 숱한 상처도
가지고 계실 것이다.
요사이 얻으신 심각한 상처도
따지고 보면
필요한 이들에게
집을 지어주시기 위해
여기 저기 험한 곳을 마다하지 않고
팔 십 육신을 힘겹게
끌고 다니시다 얻은 것들이다.
집으로 들어가며 우리집을 바라 보았다.
아이들이 떠나고 난 빈 집.
그 큰 집이 주중엔 비어 있다.
우리 부부가 주말에만 들어와 살고 있다.
평소엔 거의 비어 있는 집.
나는 과연 어떤 집을 지으며 살고 있는지.
누군가가 살고는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적어도 누군가가
살았던 적은 있는 것인지.
내 삶의 겨울이 되어
육신의 옷을 벗을때가 오면
내가 평생 지었던 집의 모습도
훤히 들어나겠지.
난 다시 한 번
어둠에 싸인 새 집들을
아주 천천히 올려다 보았다.
새들이 가슴으로 지은
그 아픈 집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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