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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속초의 추억 - 2년 전

속초의 추억 - 2년 전

속초를 다녀왔다.

속초는 한국에 있을 때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낯선 곳이었다.

원통에 본부를 둔 12사단에서 근무를 했기에
마음만 먹었더라면 군대생활을 하는 동안에라도
한 두번 다녀올 수도 있었으나
예나 지금이나 주변머리가 없는 나는
한 번도 동해쪽으로 가볼 생각을 해보질 않았다.

한계령 넘어가는 곳에 우리 사단 검문소가 있었는데
거기부터는 벗어날 수 없는사단 위수지역이기 때문이었다.
하기야 동기들 몇은 몰래 속초에 가서 회를 먹고 왔다는 무용담을 늘어 놓기도 했다.
내가 회나 술을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다가
지금처럼 사진에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니
굳이 '위수지역이탈'이라는 어마어마한 죄명으로
처벌 받을 수도 있는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일부러 갈 일은 없었던 곳이 바로 속초라는 곳이었다.
말하자면 내겐 생선회 같은 존재였다.
그닥 좋아하질 않으니
누가 같이 먹어야 한다면 먹지만
굳이 내 돈을 내고 사서 먹지는 않는 그런 정도의 존재의 무게를 가진 곳이었다.


말하자면 속초는 사춘기 시절 막연하게 내 기억을 스쳤던
여러 여자 아이들 중의 하나 같은 그런 곳이라고 말하면 될까?.
이름을 들으니 그동안은 까맣게 잊혀진 얼굴 하나가 떠오르며
막연히 잠시라도 얼굴 한 번 보고 싶다는 그런 호기심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나와는 인연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인연이 맺어지기도 쉽지 않은 속초라는 곳을
이번에 지인의 호의로 다녀왔다.
지금은 인연이 없는 것이라고 여겨
머릿속에 이미 지워진
여자 아이 하나를 만나보는 것같은
그런 작은 설레임이나 호기심이 나를 잡아 끈 것이다.

온전히 자신의 하루를 내어 놓으며
그런 기억의 뚜쟁이 역할을 해준 것은
다분히 그 지인의 희생 덕분이었다.

시간을 내어준다는 것은
자신을 온전히 내게 준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위해 시간을 낸다는 것은
거룩한 사랑과 희생의 행위이다.

어디 새로운 곳에 가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속초라는 곳을 간다는 것은 거절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염체 없이 널름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묘하게 내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어제(금요일 새벽 4시 쯤) 떠나기로 했다.
사실 내가 한국에 있었던 30여년 전에
하루 예정으로 수도권 지역에서 속초를 다녀오는 건 무리였다.
길도 구불구불한 산길을 가야하는데다가
포장이 안 된 곳이 많아서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다녀올 수가 있는 곳이니
자연 나와는 인연이 없었던 곳이기도 했다.
겨울에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내 젊은 시절 삶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인제라는 곳을 지나간다는 사실은
내 잊혀진 기억의 한 부분을 되살리는 일이 되기도 해서
참으로 설레는 마음으로 전날 잠자리에 들었다.

내가 눈을 뜬 것은 새벽 12시 반 경이었다.
시차 때문에 밤 열 두시에서 세시 사이에는 저절로 눈이 뜨였다.
김기덕 감독이 연출한 '섬'이라는 섬뜩한 영화 한 편을 보고
인터넷 서핑을 하다 보니 그럭저럭 4시가 되었다.

10여분 후에 그가 나를 데리러 왔다.
차에 오르니 그의 아내가 준비한 커피를 내밀었다.
사실 요즈음 어머니 집에 머무르며
집에서는 제대로 커피를 마시질 못했다.
게다가 옛날처럼 봉지커피나 인스탄트 커피는
더 이상 마실 수 없는 정도로 커피 입맛은 까다로와진 상태인데다가
새벽에 일어나면 알콜 중독자에게 술처럼
내겐 커피 생각이 간절했다.

그 간절하게 그리워하던 커피가 내 눈 앞에 나타나니
그 감격이란-----
알콜 중독자의 손에 술이 들려진 것 같은 환희를 맛 보았다.
그 때 내 손에 돈다발이 쥐어진다 해도
그 커피를 포기하며 밪 바꿀수 없을 정도로 귀한 것이었다. - 적어도 그 순간만은..
절실함은 그 커피에 마술을 걸었다.
그 시간 난 세상에서 가장 맛난 커피를 맛 보았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마음을 담아 내미는 커피 한 잔과도 같은 것.
난 그 때 커피 한 난에 감동을 했다.
난 조금씩 커피를 마시며
그 부부가 함께 우려낸 사랑의 마음도 함께 음미를 했다.
좋은 커피는 사람의 입안을 기쁘게해 줄 수는 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지는 못한다.
자신의 마음으로 우려내는 커피는
마음으로 마셔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감동이라는 말을 쓸 수가 있는 것이다.

-마음을 우려낸 커피-

난 그 커피와 함께 시간을 내어준 지인의
마음을 우려낸 동행에 감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gps(한국에서는 통칭 네비라고들 하는)를 작동하지도 않고
자기집을 가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고 거침없이
어둠 속을 가르며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팔당 댐이며 양수리 같은 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곳은 가로들 등불만이 어둠 속에서
추억처럼 빛나고 있었다.
팔당이나 양수리 같은 지명은
군대에서 휴가 나올 때
서울에 가까워졌다는 일종의 희망과도 같은 멧세지를 전하는 곳이었다.
그러니 그곳을 지날 때는 늘 희망과 만날 수 있다는
설레임으로 가슴이 뛰던 곳이었다.
물론 돌아갈 때는 정 반대의 느낌을 선사하는 곳이긴 했어도----

그러나 그 불빛은 영 낯이 설었다.
내가 외박이나 휴가를 나올 때 다니던 그런 길이 아니었다.
내 기억에 8-9할이 곡선이었던 길을
구부러진 철사를 잡아 늘린 것처럼
많은 부분 곧게 펴 놓았다.
30년이라는 세월은 도심지의 풍광 뿐 아니라
길의 모습도 바꾸어 놓았다.
난 미지의 세상으로 여행하는 것 같았다.
멀리 보이는 가로등 불빛이 아주 시리게 느껴진 것은
차가운 겨울 날씨 때문이었을까?

추억이나 기억, 혹은 고향 같은 것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공간에서는 사라지고
시간 속에서나 먼지를 털어내고 자세히 살펴보아야
겨우 찾을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는 것 같다.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한계령이니 진부령 , 미시령 같은 지명이
표지판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이었다.
구불구불 산을 나사선처럼 돌아 오르던 그 길을
터널을 뚫어 곧게 만들어 놓았다.
곡선을 따라 느릿느릿 가던 길을
잠시 한 눈을 팔 여유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야 했다.
곡선의 다른 이름은 느슨함이다.
혹은 여유로움이라고 해도 좋겠다.
하기야 옛날 시외 버스를 타고 가다
할아버지가 소변이 급하다고 하면
그 할아버지가 볼 일을 마칠 때까지
운전기사든 승객들이든
말 없이 기다려 주었다.

직선의 길을 가는 이 시대에
아직 그런 곡선 시대의 여유로움이나 인정 같은 것이 남아 있을까?
빠름이나 효율성 같은 것을 얻은 대신에
완만함이나 인정 같은 것을 이 직선의 시대는 잃어버렸다.

(예전 같으면 미시령을 넘었다고 해야 할 텐데
터널을 지난다는 표현을 써야할 것 같다.)
미시령 터널을 지나고 나서 얼마를 달렸을까
어둠 속에서 옆과 정면에 눈이 쌓인
산의 윤곽이 어렴풋이 나타났다.
지인이 설악산이라고 했다.
말을 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신비함으로
새벽의 설악은신비로운 기운으로
내 마음을 두드렸다.
이것도 산에 무슨 기운 같은 것이 있어서
그 기운으로 내 마음을 두드렸는지는 몰라도
그 순간 내가 느꼈던 감정도
감동의 범주에 넣어도 모자람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 감동과 함께 감탄을 하는 사이 아침이 되었다.

그리고 우린 어느새
속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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